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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소도시의 몰락 몇 해 전 동부의 누이네 집에 다녀오며 느낀 일이다. 2차 대전을 전후해서 개발된 캘리포니아 주와 달리 동부는 미국의 역사를 담고 있는 지역이다. 그만큼 낡고 오래된 곳이기도 하다. 누이는 펜실베이니아의 ‘엘렌 타운’에서 30마일 떨어진 ‘델라웨어 워터 갭’이라는 작은 마을에 산다. LA에서는 엘렌 타운까지 직접 가는 비행기가 없어 시카고를 경유해서 갔다. LA 발 비행기는 상당히 큰 기종의 항공기였는데 탑승부터 수월치 않았다. 가방을 화물로 체크인하면 25달러의 비용을 더 내야 하기 때문에 승객들은 무겁고 큰 가방들을 무리하게 기내로 끌고 들어왔고, 나중에 탑승하는 승객들은 짐을 넣을 공간이 없어 뒤늦게 짐을 화물칸으로 내 보내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이런 현상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발생했다. 계속 성.. 2020. 7. 22.
불효자는 웁니다 출근길,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다. 오후가 되어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나를 찾던 이가 이제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가시고 나니 평소에는 잊고 지내던 옛 기억들이 떠 오른다. 장애인 편의시설이라고는 전무하던 시절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며칠을 울고 떼를 쓰던 나를 달래고 안방 학교를 차려 내게 공부를 가르쳤다. 커다란 달력 종이 뒷면에 “ㄱ, ㄴ, ㄷ, ㄹ”을 쓰고 “ㅏ, ㅑ, ㅓ, ㅕ”를 써서 붙여놓고 “가, 나, 다, 라”를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한글을 배웠다. 덧셈, 뺄셈, 구구단도 그렇게 배웠다. 어머니는 자주 나와 내 동생에게 옛날이야기와 동화를 들려주곤 했는데, 훗날 집에 있는 책들을 읽다가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두꺼운 백과사전.. 2020. 7. 21.
거라지 세일 벼르던 거라지 세일을 했다. 차고를 정리하던 아내가 거라지 세일을 하겠노라고 선언하더니 그다음 주로 날짜를 잡아버렸다. 금요일 오후 퇴근길에 보니 세일을 한다는 종이를 골목 군데군데 전봇대에 붙여 놓았다. 남들은 요란한 색상에 큰 글씨로 만들어 붙이던데, 우리 것은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겨우 보일까 말까 하다. 저걸 보고 사람들이 올까? 다음날 아침 6:30분, 아직 물건을 다 꺼내지도 않았는데 첫 손님이 왔다. 많이 살 것처럼 물건을 이것저것 한참이나 고르더니 달랑 햇볕 가리개를 하나 산다. 1불이다. 아내는 그녀가 예의가 있는 손님이라며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했던 그릇을 덤으로 주었다. 자기가 첫 손님인 것을 알고 개시는 해 주고 갔다는 것이다. 아침나절 심심치 않게 손님들이 찾아와 물건은 많이.. 2020. 7. 20.
추억의 함박스테이크 요즘은 한국의 외식 메뉴도 다양해져 파스타를 비롯해서 전 세계 음식을 풍족하게 맛볼 수 있지만, 60-70년대는 사정이 좀 달랐다. 조금 고급스런 외식이라면 경양식 정도였다. 경양식이란 간단한 서양식 일품요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메뉴에는 비프스테이크도 있긴 하지만, 보통의 데이트 코스라면 함박스테이크나 돈가스, 오므라이스 정도였다. 내가 처음으로 서양요리에 맛을 들인 것은 외할아버지를 통해서다. 할아버지는 인사동을 중심으로 돈 있는 상인들을 모아 친목회를 운영하셨다. 회원들이 투자한 돈을 굴려 그 이자로 모임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는 방식이었다. 친목회의 정기모임은 주로 식당에서 이루어졌는데, 중식, 일식, 또는 경양식집 등에서 이루어졌다. 장소를 예약하고 회원들에게 연락하는 일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는데.. 2020. 7. 19.
어떤 인연 여동생이 중학생 때의 일이다. 아르바이트로 영어를 가르치려고 했는데 쉽게 학생을 구할 수 없었다. 그 무렵 과외공부나 가정교사는 주로 대학생들이 도맡아 했다. 내세울 학력이 없는 내가 자력으로 학생을 구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동생이 함께 과외수업을 받을 친구를 하나 소개하여 주었다. 마침 수학을 가르칠 사람은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친구가 ‘채수안’이다. (오래 전의 일이라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몇 달 동안 나는 영어를, 그는 수학을 가르쳤다. 얼마 후 동생의 친구가 그만두며 과외공부도 없어졌다. 과외를 그만둔 후에도 그는 가끔 나를 찾아왔다. 나와 바둑을 두기 위해서다. 학력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나이는 먹어 가는데 내세울 학력이 없다는 것은 내게는 큰 콤플렉스였다. 제법 영어를 익힌 후이.. 2020. 7. 18.
비린 맛 함경도가 고향인 부친은 고기보다 생선을 더 좋아하셨다. 어려서 우리 집 밥상에는 거의 매일 생선이 올라왔다. 고향에서는 생일이면 감자가 듬성듬성 들어 간 쌀밥에 무를 채 썰어 넣은 가자미 국을 미역국 대신 먹었다는 아버지의 투정에 가끔은 아버지 생신에 미역국 대신 가자미 국이 상에 오르기도 했다. 별식으로 민어나 조기 국을 먹는 외가와 달리, 집에서는 온갖 비린 맛의 생선이 국이 되어 올라왔다. 동태나 병어는 물론 도루묵까지 국으로 탈바꿈해서 올라왔다. 외할아버지는 생선가시를 무척이나 무서워해서 생선이 상에 오른 날이면 할머니가 곁에서 가시를 발라드렸다. 그러다가 잔가시라도 하나 나오면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생선의 가운데 토막은 할아버지와 나의 몫이었고, 할머니는 생선 대가리와 꼬리만 잡수셨.. 2020.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