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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기억

비린 맛

by 동쪽구름 2020. 7. 17.

함경도가 고향인 부친은 고기보다 생선을 더 좋아하셨다. 어려서 우리 집 밥상에는 거의 매일 생선이 올라왔다.

 

고향에서는 생일이면 감자가 듬성듬성 들어 간 쌀밥에 무를 채 썰어 넣은 가자미 국을 미역국 대신 먹었다는 아버지의 투정에 가끔은 아버지 생신에 미역국 대신 가자미 국이 상에 오르기도 했다. 별식으로 민어나 조기 국을 먹는 외가와 달리, 집에서는 온갖 비린 맛의 생선이 국이 되어 올라왔다. 동태나 병어는 물론 도루묵까지 국으로 탈바꿈해서 올라왔다.

 

외할아버지는 생선가시를 무척이나 무서워해서 생선이 상에 오른 날이면 할머니가 곁에서 가시를 발라드렸다. 그러다가 잔가시라도 하나 나오면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생선의 가운데 토막은 할아버지와 나의 몫이었고, 할머니는 생선 대가리와 꼬리만 잡수셨다.

 

실향민의 자손답게 나는 친할머니를 사진에서만 보았을 뿐이다. 일찍이 대를 이를 손이 없는 친척집에 양자를 간 할아버지 덕에 할머니는 거의 매달 제사에 시달렸다고 한다. 제사상에는 늘 생선이 올라갔는데, 파리를 피해 높은 장대에 매달아 말린 생선을 지지고 구워 제사상을 차려 놓으면, 제사를 지내러 온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은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할머니의 속을 뒤집어 놓곤 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타박했던 음식을 한 보따리씩 싸가지고 갔다고 한다.

 

함경도식 가자미 구이나 동태찜은 정말 맛있다. 꾸덕하게 말린 가자미를 연탄불에 구워 먹으면, 소고기 등심구이보다 맛있다. 겨울에 언 상태로 말린 동태를 쪄서 양념장을 찍어 먹으면, 이 또한 별미다. 어머니가 못 만드는 생선요리가 바로 이 동태찜과 가자미식해였다. 좁쌀 밥과 듬성듬성 채를 썬 무에 고춧가루와 가자미를 잘라 넣고 버무려 만드는 가자미식해는 적당히 삭아야 제맛이다.

 

이런 함경도식 생선요리는 아버지 외사촌의 집에 가면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숙모가 되시는 할머니가 늘 고향식으로 생선요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서 배워 제법 맛난 가지미식해를 만들던 고모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해병대에서 퇴역하신 아버지가 양계장을 하게 되었다. 늘 이런저런 이유로 죽어 나오는 닭이 생겼다. 처음에는 이런 닭들이 밥상에 오르곤 했는데, 나중에는 시장에 가지고 가서 생선과 바꿔 먹었다.

 

요즘은 젓갈을 대량 생산해서 간장이나 참기름처럼 병에 넣어 팔지만, 그 무렵에는 대개 집에서 생선젓을 담가서 썼다. 황새기나 멸치젓을 담아 적당히 삭으면 그 살을 발라 양념해서 먹기도 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젓을 담기 위해 사온 멸치 중에서 굵은 놈만 골라 몇 군데 칼집을 내고 소금을 뿌려 연탄불에 구워 먹었는데, 엄청 맛있었다. 누이와 동생들은 학교에 갔고, 집에 있던 나만 얻어먹었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나뿐이다.

 

알을 통통하게 밴 도루묵을 손질해 물기가 빠질 정도로 말려 구워 먹으면 이 또한 별미다. 도루묵 철이면 거의 매일 점심에 도루묵 구이가 상에 올랐다. 머리를 잡고 살짝 돌려 빼면 가운데 뼈까지 통째로 나온다. 그러면 도루묵 살에 알을 채워 넣은 도루묵 순대처럼 먹을 수 있다.

 

70년대 초 벽제에 살 때, 근처 부대의 미군 부부에게 방을 세 준 적이 있다. 그 부인의 이름이 ‘테리’ 였는데, 매일 내게 30분씩 영어를 가르쳐 주는 대신 점심을 함께 먹었다. 그녀도 도루묵 구이에 맛을 들여 몇 마리씩 먹곤 했다.

 

누나가 중학교에 진학하며 생선요리에도 변화가 왔다. 토막 낸 고등어에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고등어 튀김이나 꽁치를 통째로 다져 완자로 빗어 만든 꽁치 튀김 등이 등장한 것이다.

 

아내는 고등어에 신김치와 무를 넣고 지진 고등어 묵은지 조림이나 백종원식 꽁치조림을 잘 만든다. 난 꽁치구이나 밀가루를 살짝 묻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튀겨낸 가자미를 좋아한다. 요즘은 주로 생선을 프라이 팬이나 오븐에 구워 먹지만, 생선구이는 아무래도 연탄불 위에 석쇠를 올리고 굵은소금을 뿌려 구워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 

 

생선은 적당히 비린 것이 맛있다. 그게 바로 생선의 맛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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