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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기억

라면을 끓이며

by 동쪽구름 2020. 7. 25.

영어로 쓰인 책은 번역본 보다는 원서로 읽는 것이 좋다. 한글로 쓰인 책을 영어로 번역하면 감이 떨어지듯이, 영어책도 한국어로 바꾸어 놓으면 느낌이 다르다. 영어책은 도서관에 가지 않고 전자책을 다운로드하여 읽거나, 아마존에서 중고책을 사서 읽는다. 가끔은 한국 책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동네 도서관에 가면 한국 책 코너가 따로 있지만 내가 보고 싶은 책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에서 한국 책은 가격이 만만치 않다. LA에 나가면 중고 책방이 있긴 한데, 이 또한 번거로운 일이다. 1월 초 연휴에 우연히 ‘알라딘’에서 우편 주문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0 이상 주문을 하면 무료배송에 30일 배송을 선택하면 10% 추가 할인까지 해 준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책을 5권 골라 주문을 했다.

 

30일이 다가오자 언제 오려나 하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책이 왔는데, 한 권만 먼저 왔다. 그 꿈을 꾸던 날 오후에 정말 거짓말처럼 책이 왔다. 꿈과 달리 5권이 모두 왔다. 꿈이 맞았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 아내와 조카아이들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시큰둥하다. 가족이라도 남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집어 들었다. 세계 인스턴트 라면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라면 소비가 세계 1위라고 한다. 한 사람 당 1년에 74개를 먹는다고 한다. 그다음이 인도네시아로 60개, 베트남이 57개다. 한국인이 1년에 먹는 라면이 36억 개고, 중국인은 462억 개를 먹는다.

 

문득 내가 기억하는 라면의 추억이 떠 오른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외가에서는 밀가루 음식을 즐기지 않았는데, 짜장 라면만은 예외였다. 할아버지가 분식집에서 짜장면을 사 드신다는 것을 알게 된 할머니가 집에서 짜장 라면을 끓이기 시작한 것이다. 할머니는 한글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포장지에 적힌 조리법을 알려 드렸는데, 할머니는 제조사의 조리법은 무시해 버리고 할머니식 조리법을 개발했다.

 

마치 라면을 끓이듯이 물을 넉넉히 붓고 분말 짜장을 풀어 면을 끓이고, 감자, 양파, 당근을 채 썰어 미리 볶아 놓았다가 국물이 자작하게 있는 짜장면에 얹어서 내놓았다. 물이 넉넉하니 소스는 짜지 않고, 기름에 볶은 양파 덕에 제법 짜장면 맛이 났다.

 

벽제 집에 살 때는 동생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부모님이 갈빗집에서 쓸 식재료를 사기 위해 시장에 가고 나면 나 혼자 아침을 먹게 된다. 일하는 아이가 끓여주는 라면 반개를 먹었다.

 

라면은 단연코 신김치를 곁들여 먹어야 맛있다. 혼자 먹는 라면보다는 큰 냄비에 두세 개를 한꺼번에 끓여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것이 더 맛있다. 끼니로 먹는 것보다 저녁이 좀 부족했다 싶은 겨울밤에 밤참으로 먹는 것이 더 맛있고, 그릇에 담아 먹기보다는 냄비 뚜껑에 올려 후후 불어가며 먹는 것이 더 맛있다.

 

80년대 초, 미국에 와서 처음 먹었던 ‘이치방’ 라면의 맛을 잊을 수 없다. 그 무렵 한국 라면에는 라면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미국에서 먹었던 ‘이치방’ 라면에는 그런 냄새가 없었다.

 

나는 물을 넉넉히 넣고 라면을 끓인다. 3컵이라고 적혀 있으면 4컵 정도 넣는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분말 수프를 ¾ 정도 먼저 넣고 면은 절반으로 잘라서 넣는다. 수프를 다 넣으면 좀 짠듯하다. 센 불에 조리법 보다 30-45초 정도 적게 끓인다. 면이 끓기 시작하면 뭉쳐진 것을 잘 풀어준다. 새우나 오징어 같은 해물과 파를 넣으면 더 좋다. 이런 해산물을 넣을 때는 달걀은 넣지 않는다.

 

면을 넣으며 달걀도 같이 넣는데, 달걀이 풀어지지 않고 수란처럼 익도록 한다. 나는 달걀노른자가 풀어진 국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면에 떡이나 만두를 넣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떡이나 만두피의 녹말 성분이 국물에 녹아드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 식당에서 파는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국물이 느끼하고 짜기 때문이다. 라면은 역시 인스턴트 라야 제 맛이 난다. 컵 라면도 좋아하지 않는다. 면은 물에 끓여야 제맛이다. 

 

아내를 만난 후 라면을 잘 먹지 않게 되었다. 아내는 매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라면도 매운 것을 먹는데, 나는 매운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굳이 라면을 먹지 않아도 끼니를 잘 챙겨주니 라면 먹을 기회가 없다.

 

요즘은 가끔 사무실에서 점심시간에 라면을 얻어먹곤 한다. 남이 끓인 라면을 1회용 컵에 얻어먹는 것도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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