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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기억

추억의 함박스테이크

by 동쪽구름 2020. 7. 19.

요즘은 한국의 외식 메뉴도 다양해져 파스타를 비롯해서 전 세계 음식을 풍족하게 맛볼 수 있지만, 60-70년대는 사정이 좀 달랐다. 조금 고급스런 외식이라면 경양식 정도였다. 경양식이란 간단한 서양식 일품요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메뉴에는 비프스테이크도 있긴 하지만, 보통의 데이트 코스라면 함박스테이크나 돈가스, 오므라이스 정도였다.

 

내가 처음으로 서양요리에 맛을 들인 것은 외할아버지를 통해서다. 할아버지는 인사동을 중심으로 돈 있는 상인들을 모아 친목회를 운영하셨다. 회원들이 투자한 돈을 굴려 그 이자로 모임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는 방식이었다.

 

친목회의 정기모임은 주로 식당에서 이루어졌는데, 중식, 일식, 또는 경양식집 등에서 이루어졌다. 장소를 예약하고 회원들에게 연락하는 일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는데, 곁에서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모임 장소가 ‘미장’이라고 하면 난 단번에 기분이 좋아졌다. ‘미장’ 은 경양식집이었고, 그런 날이면 할아버지가 톱밥으로 만든 일회용 도시락에 구운 닭고기나 비프스테이크 조각을 남겨 오셨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반으로 갈라 중간에 버터와 잼을 넣은 둥근 ‘롤’ 빵도 한 무더기 가지고 오셨다.

 

손주에게 주겠다고 본인의 식사를 남겨 가지고 가는 할아버지를 위해 매니저가 아량을 베푼 것이리라. 물론 할아버지에게 잘 보여야 매출이 오른다는 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날이면 적당히 술이 오른 할아버지가 술냄새를 풍기며 내 뺨에 까칠한 수염을 비벼도 싫지 않았다.

 

그 무렵 한국의 경양식 집에서 주는 고기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주려고 남기기 위해 할아버지는 수프와 빵으로 배를 채우셨을 것이다.

 

내 돈으로 처음 사 먹은 경양식은 함박스테이크였다. 70년대 말 번역실에서 영어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할 때, 내게 일감을 주는 부장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함께 일하던 알바 대학생들과 송별회를 준비한 곳이 신문회관 지하의 ‘프레스’라는 경양식집이다. 이 집은 아버지의 외사촌 네가 운영하고 있었다.

 

함박스테이크에 소스와 달걀프라이를 얹고, 약간의 파스타를 곁들인 ‘프레스’ 정식이 인기 메뉴였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데 택도 없이 부족했다. 각자 먹은 밥값에 부장님 식사비 일부를 부담해야 계산이 맞는데, 지가 먹은 돈도 모자라게 내놓으니 모자랄 밖에… 결국 내 주머니를 다 털고 모자라는 돈은 다음에 가져오마 하고는 자리를 떴다. 물론 그 돈은 나중에도 갚지 못했다.

 

함박스테이크는 내가 만들 줄 아는 몇 안 되는 메뉴 중 하나다. 간 소고기 (돼지고기를 섞어도 됨) 1파운드에, 잘게 다져 볶은 양파 1개, 빵가루 1컵을 넣고, 달걀 1개를 풀어 잘 섞어준다. 간은 소금, 후추, 그리고 약간의 마늘가루로 한다. 잘 섞은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뭉치고 눌러 함박스테이크 모양을 잡아, 기름을 붓고 뜨겁게 달군 프라이 팬에 양쪽이 노릇하게 굽는다. 350도 정도로 예열을 마친 오븐에 10분 정도 넣어 속까지 완전히 익혀주는 것이 좋다.

 

만약 프라이 팬에 굽는 것이 성가시게 느껴지면 모양을 잡은 함박스테이크 고기를 넓은 팬에 놓고 고기 위에 올리브 유를 살짝 뿌려 오븐에 넣고 구워도 된다.

 

며칠 전에는 큰 아이에게서 함박스테이크를 어떻게 만드냐는 메시지가 왔다. 아마도 여자 친구에게 만들어 주려는 모양이다. 얼른 레시피를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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