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17 허송세월 김훈은 ‘프롤로그’ 대신 ‘앞에’라는 제목의 글로 책을 시작하고 있다.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부고다. 그는 부고(죽음)가 그다지 두렵지 않다고 썼다. “내가 살아서 읽은 책 몇 권이 나의 마음과 함께 무로 돌아가고, 내가 쓴 글 몇 줄이 세월에 풍화되어 먼지로 흩어지고…” (7 페이지) 이 대목에서 나는 차고에 쌓아 놓은 책들과 브런치에 올려놓은 1,000 꼭지가 넘는 글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사라지고 나면 결국은 글들도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리겠구나. 그는 술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와인의 맛은 로맨틱하고, 그 취기의 근본은 목가적이다… 막걸리는 생활의 술이다. 막걸리는 술과 밥의 중간쯤 되는 자리에 있다… 소주는 대중의 술이며 현실의 술로서 한 시대의 정서를 감당해 왔지만 풍미가 없고 색감이.. 2025. 4. 22. 숫벌과 나 6촌 동생의 생일이라 네 집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네 집이라 함은 나와 내 동생, 생일을 맞은 6촌 동생,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아저씨가 부르는 아버지의 6촌 동생이다. 말이 아저씨지 나와는 동갑이다. 부모님이 모두 실향민이었기에 일가친척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미국에 오고 나니 더욱 그러하다. 장소는 K타운에 위치한 J 노래교실. 준비해 간 음식을 먹고 마시고, 그 자리에서 노래까지 부를 수 있다. 식당에서 밥 먹고 카페나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번거로움이 없어 좋다. 젊어서는 서로 먹고살기 바빠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공통분모를 가진 동년배가 모이면 재미있고 좋다. 조금 늦게 아저씨 부부가 도착했는데, 아줌마가 (우린 늘 그녀를 아줌마라 불러왔다) 지팡이를 짚고 들어 온다. 얼마 .. 2024. 4. 7.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성당에서는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그를 위한 ‘연도’를 한다. 참석자들이 기도문에 음률을 넣어 노래로 주고받으며 이어가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다. 선창과 리드를 할 사람이 없으면, 그냥 읽어도 된다. 코로나 펜데믹 이전에는 상을 당하면 회관에서 별도의 연도 모임이 있었다. 가족은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준비하고, 신자들이 모여 초를 켜고 망자의 사진을 앞에 놓고 연도를 드렸다. 연도가 끝나면 참석자들은 가족에게 위로의 말과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슬픔과 위로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회관에서 연도 모임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유일한 신자인 아내와 내가 연도 모임을 사진으로 찍어 형제들에게 보내주었다. 코로나로 성당이 문을 닫자 상을 당해도 별도의 모임은 할 수 없었고, 연령회.. 2023. 4. 23. 굿 바이, 윌리엄 나는 그가 죽고 난 다음에서야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를 처음 본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도 10여 년은 지난 일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날 사거리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 정거장 벤치에 까만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옆에는 바퀴 달린 철제 트렁크 카트에 가방이 실려 있었다. 홈리스임이 분명한데 여느 홈리스와는 달라 보였다. 나이는 50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포스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그 벤치는 그의 거처가 되었다. 대부분의 홈리스들은 상가 주변에 무리를 지어 텐트를 치고, 주변에 너저분한 물건과 쓰레기를 널려 놓는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쓰러져 잠을 자기도 하고, 더우면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기도 하고, 낮에도 술이나 약에 취해 뻘건 .. 2023. 3. 13.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