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죽음19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보’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기력이 나날이 떨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러운 마음으로 살고 있다. 치매에 걸려 요양시설에 살고 있는 아내는 그가 아들과 방문을 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혼자 집에 남은 그는 아내가 쓰던 스카프를 병 속에 넣어두고 그리울 때면 꺼내어 그녀의 향기를 맡는다. 이제 그 병의 뚜껑을 여는 일도 쉽지 않다. 매일 요양보호사들에 집으로 와 그의 식사를 챙기고 목욕을 시켜준다. 요양보호사들은 그에게 기저귀를 권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며 자주 실례를 한다. 오랜 친구 ‘투레’와 반려견 ‘식스텐’이 유일한 기쁨이다. 다른 도시에 살며 역시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살고 있는 투레와는 자주 전화를 한다. 아들 ‘한스’가 있지만 좋은 관.. 2025. 11. 7.
너 늙어봤냐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이건 요즘 내가 즐겨 듣는 서유석의 노래 제목이다. 겪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다. 젊은 사람들 눈에는 나이 든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이 없을 듯싶겠지만, 살아보면 이 나이에도 새로 경험하고 깨닫는 것들이 있다. 난 어려서부터 냉수만 마셨다. 할머니가 누룽지를 끓여 구수하게 만든 숭늉을 드시며 “시원하다”하는 것이 도무지 생소하고 낯설었다. 받아 놓은 물은 차갑지가 않아, 추운 겨울에도 마당의 수도에서 갓 받는 얼음 같은 냉수만 마셨다. 우리 집 정수기에서는 온수, 냉수, 상온, 이렇게 세 가지 온도의 물이 나온다. 어느 날부터 냉수 대신 상온의 물을 마시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게다가 누룽지를 끓인 물이 구수하니 맛있어졌다. 점심을 잘 먹은 날은 끓.. 2025. 5. 15.
허송세월 김훈은 ‘프롤로그’ 대신 ‘앞에’라는 제목의 글로 책을 시작하고 있다.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부고다. 그는 부고(죽음)가 그다지 두렵지 않다고 썼다. “내가 살아서 읽은 책 몇 권이 나의 마음과 함께 무로 돌아가고, 내가 쓴 글 몇 줄이 세월에 풍화되어 먼지로 흩어지고…” (7 페이지) 이 대목에서 나는 차고에 쌓아 놓은 책들과 브런치에 올려놓은 1,000 꼭지가 넘는 글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사라지고 나면 결국은 글들도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리겠구나. 그는 술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와인의 맛은 로맨틱하고, 그 취기의 근본은 목가적이다… 막걸리는 생활의 술이다. 막걸리는 술과 밥의 중간쯤 되는 자리에 있다… 소주는 대중의 술이며 현실의 술로서 한 시대의 정서를 감당해 왔지만 풍미가 없고 색감이.. 2025. 4. 22.
숫벌과 나 6촌 동생의 생일이라 네 집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네 집이라 함은 나와 내 동생, 생일을 맞은 6촌 동생,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아저씨가 부르는 아버지의 6촌 동생이다. 말이 아저씨지 나와는 동갑이다. 부모님이 모두 실향민이었기에 일가친척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미국에 오고 나니 더욱 그러하다. 장소는 K타운에 위치한 J 노래교실. 준비해 간 음식을 먹고 마시고, 그 자리에서 노래까지 부를 수 있다. 식당에서 밥 먹고 카페나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번거로움이 없어 좋다. 젊어서는 서로 먹고살기 바빠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공통분모를 가진 동년배가 모이면 재미있고 좋다. 조금 늦게 아저씨 부부가 도착했는데, 아줌마가 (우린 늘 그녀를 아줌마라 불러왔다) 지팡이를 짚고 들어 온다. 얼마 .. 2024. 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