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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숫벌과 나

by 동쪽구름 2024. 4. 7.

6촌 동생의 생일이라 네 집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네 집이라 함은 나와 내 동생, 생일을 맞은 6촌 동생,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아저씨가 부르는 아버지의 6촌 동생이다. 말이 아저씨지 나와는 동갑이다. 부모님이 모두 실향민이었기에 일가친척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미국에 오고 나니 더욱 그러하다. 

 

장소는 K타운에 위치한 J 노래교실. 준비해  음식을 먹고 마시고,  자리에서 노래까지 부를  있다. 식당에서  먹고 카페나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번거로움이 없어 좋다. 젊어서는 서로 먹고살기 바빠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공통분모를 가진 동년배가 모이면 재미있고 좋다. 

 

조금 늦게 아저씨 부부가 도착했는데, 아줌마가 (우린 늘 그녀를 아줌마라 불러왔다) 지팡이를 짚고 들어 온다. 얼마 전에 무릎을 다쳤다고 한다. 60대 초/중/후가 다 모인 자리다. 자연스럽게 아픈 곳, 먹는 약 이야기가 나오고, 최근에 갑자기 죽은 아저씨의 골프 친구 이야기가 나왔다. 봄을 맞아 부부가 골프채도 새로 장만하고 여행계획까지 세워 놓았는데,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죽는 시기와 사별 후 재혼으로 이어졌다. 6촌 동생의 아내는 남편을 자기보다 딱 1년 먼저 보내고 나서 죽겠다고 한다. 다른 아내들도 거의 동의하는 표정이다. 이유인즉, 자기가 챙겨주지 못하면 제대로 먹고살까 싶은 걱정과 내 죽고 나면 다른 여자 만나겠지 싶은 질투(?)가 복합된 감정인 듯싶었다. 

 

그러자 아줌마가 "이 나이에 재혼은 왜 하나, 늙은 남자 뒤치다꺼리할 필요가 있나." 하며 한마디 한다. 아내들의 얼굴을 보니 말은 안 해도 동의하는 표정이다. 

 

여자와 남자의 다른 면이 아닌가 싶다. 여자에게 남자가 필요한 주된 이유는 출산과 복지일 것이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자연의 법칙이다. 후손을 낳는 일을 마친 여자에게 남자는 가을이 되어 꿀만 축내는 숫벌과 다를 것이 없다. 

 

게다가 7080 세대 한국 남자들은 의식주 노동은 거의 전적으로 아내에게 의존하며 살아왔다. 아내들에게 동반자보다는 짐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냥 허허 웃을 수밖에. 그나마 나이 들고 철들어 알게 된 생존하는 요령이다. 

 

인명은 재천이라 태어나고 죽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확률은 존재한다. 2022년 기준, 한국 남자의 기대 수명은 79.9세고, 여성은 85.6세, 여자가 6년 정도 더 산다. 제수씨의 소망대로 동갑인 6촌 동생은 1년이 아닌, 6년 정도 먼저 죽을 것이다. 어느새 우리가 노인이 되어 죽음을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었나 싶다. 겉으로는 허허 웃으며 넘겼지만, 입맛은 씁쓸하다. 

 

그날 노래방은 노래하기 좋아하는 주인공이 독차지했지만, 나도 두곡 불렀다. 노래를 부르다 생각해 보니, 40년도 넘은 노래들이다. 노인들은 추억을 곱씹으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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