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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내 나이 6-7살 때의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무렵 나는 소아마비를 치료하러 을지로에 있는 메이컬 센터에 다니고 있었다. 그날은 외할아버지와 병원에 갔었다. 물리치료를 마치고 약을 받아가야 했다. 할아버지는 맹장수술한 자리에 탈장이 생겨 무거운 것을 오래 들지 못하셨다. 나를 벤치에 내려놓고 모퉁이를 돌아 약국으로 약을 타러 가셨다. 곧 온다던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혹시 나를 버리고 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훌쩍이다 잠시 후,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모두들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쳐 가버렸는데, 하얀 간호사복을 입은 누나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내게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훌쩍이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나를 덥석 팔에 안고 약국으로 갔다. 마침 약을 찾아오.. 2023. 11. 25.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 갑자기 회사의 여직원과 결혼을 발표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회사도 그만둔 ‘다카코’에게 ‘진보초’에서 고서점을 하고 있는 외삼촌으로부터 책방 일을 도와달라는 전화가 온다. 작품의 배경이 된 진보초라는 동네는 고서점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집세 없이 서점의 2층 작은 방에 살며 가게 일을 도와 달라는 외삼촌의 제의를 받아들여 진보초에 머물게 된다. 그녀는 곧 일본 근대문학 (1868-1945년)에 빠져 들고, 근처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친분을 맺게 된다. 일상의 즐거움을 찾은 그녀에게 어느 날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앞둔 옛 남자친구가 연락을 해 온다. 그녀의 감정의 변화를 알아차린 외삼촌에게 다카코는 남자와 헤어지게 된 배경을 털어놓는다. 외사촌의 제안에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밤 11시에 그 남자.. 2023. 11. 18.
당신 없는 일주일 라디오 방송국의 프로듀서인 ‘저드 알트먼’은 아내인 ‘퀴인’이 그의 상사인 ‘웨이드’와 집에서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집을 나온다. 며칠 후, 누나 ‘웬디’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간다. 어머니의 집에는 형 ‘폴,’ 한때 저드의 여자친구였던 형수 ‘애니,’ 누이 웬디와 일중독으로 아내를 소홀히 하는 매형 ‘배리,’ 장례식이 시작한 후 겨우 도착한 막내 ‘필립’과 그의 나이 많은 여자친구 ‘트레이시,’ 그리고 웬디의 어린 시절 남자친구였으며 사고로 뇌손상을 입은 ‘호리’와 그의 어머니 ‘린다’등이 모여 있다. 어머니 ‘힐러리’는 무신론자였던 아버지가 알트만 집안 아들들의 친구인 랍비 ‘찰스’의 인도로 유대교식 장례문화인 7일간의 시바(shiva)를 부탁했노라고 선언한다. 영화.. 2023. 11. 11.
아버지의 해방일지 노동절 새벽,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3일장을 치르며 화자인 ‘고아리’가 조문 오는 사람들과 아버지의 인연을 풀어놓으며 전개되는 이야기다. 그녀의 부모는 지리산과 백운산을 누볐던 빨치산이다. 해방 직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아버지는 패했고, 동지들을 죽었으며, 위장 자수를 해서 조직을 재건하려던 일도 실패했다. 아버지는 자본주의 한국에서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사회주의가 뭔가. 가난한 사람도 부자랑 똑같이 공부할 수 있고, 여자도 남자하고 동등하게 사는 세상 아닌가. 책에는 크게 네 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빨갱이’ 형 때문에 집안이 망했고, 자신의 삶도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작은아버지다. 평생 술꾼으로 산 작은아버지는 이따금 형을 찾아와 “니는 그리 잘나서 집안 말아 .. 2023. 11. 7.
수채화 I (5) 할로윈도 예전 같지 않다.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는 할로윈 저녁이면 온갖 치장을 한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동네를 돌며 사탕을 받아 갔다. 해 질 녘에 시작한 “trick or treat!” 은 밤까지 이어져 8-9시에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요즘은 할로윈 저녁에 동네를 도는 아이들 보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아이들보다는 성인들의 명절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금년 가을에 대학에 간 조카 녀석에게 물어보니 캠퍼스와 기숙사에서 주말에 몇 개의 파티가 있었고, 할로윈 저녁에도 파티가 있다고 한다. 할로윈 저녁, 우리 집에는 딱 한 사람 건넛집 꼬마가 왔다 간 것이 전부다. 할로윈 다음날 학교에 가니 교수가 어제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인지 ‘스니커즈’ 초콜릿을 가지고 와 하나씩 나누어 준다... 2023. 11. 3.
수채화 I (4) 다음 학기 스케줄이 나왔다. 미리 등록을 하려고 하는데 수채화 클래스를 찾을 수 없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교수에게 물어보니 봄학기에는 수채화 클래스가 없다고 한다. 원래 ‘수채화 I, II, III,’ 세 개의 클래스가 있었는데, 등록율이 저조해 세 개를 통합, 하나로 만들었다. 이유인즉, 수채화는 미술 전공 학점에 포함이 되지 않아 비인기 과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만 해도 학생이 10여 명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가을 학기에만 수채화 클래스를 제공한다. 수채화 II는 내년 가을 학기에나 들을 수 있다. 마침 갤러리에서 지난 학기 클래스의 교수였던 Nagy를 만나 물어보니 아크릴화를 추천해 준다. 아내는 아크릴이나 유화는 캔버스도 크고 이젤을 사용하는 등, 내가 감당하기가 좀 힘.. 2023.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