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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아버지의 해방일지

by 동쪽구름 2023. 11. 7.

노동절 새벽,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3일장을 치르며 화자인 ‘고아리’가 조문 오는 사람들과 아버지의 인연을 풀어놓으며 전개되는 이야기다. 
 
그녀의 부모는 지리산과 백운산을 누볐던 빨치산이다. 해방 직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아버지는 패했고, 동지들을 죽었으며, 위장 자수를 해서 조직을 재건하려던 일도 실패했다. 아버지는 자본주의 한국에서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사회주의가 뭔가. 가난한 사람도 부자랑 똑같이 공부할 수 있고, 여자도 남자하고 동등하게 사는 세상 아닌가. 
 
책에는 크게 네 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빨갱이’ 형 때문에 집안이 망했고, 자신의 삶도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작은아버지다. 평생 술꾼으로 산 작은아버지는 이따금 형을 찾아와 “니는 그리 잘나서 집안 말아 묵었냐?”라며 행패를 부리곤 한다. 
 
두 번째는 구례 마을 아버지 친구들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소학교 동창이며 시계방 주인인 박 선생. 군인이었고 교련선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구다. 아버지의 “담배 친구”였다는 17세 소녀. 총부리를 맞들고 싸웠지만 친구로 남은 이들이 속속 등장한다. 
 
세 번째는 화자인 나와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가장 핵심은 ‘빨치산의 딸’로 힘들게 살아온 딸이 아버지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는 내가 알던 아버지는 실체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음을 깨닫는다. 
 
네 번째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일들이다. 평생의 동지이자 같이 사회주의자였던 어머니는 남편보다는 현실적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로 늘 어머니에게 구박을 받는다. 
 
이 소설은 작가 ‘정지아’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의 부모는 사회주의자였으며, 아버지는 수감생활도 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실향민이었던 돌아가신 아버지는 해방 얼마 후 월남하여 국군 장교가 되었고, 한국전쟁이 나자 참전했다. 고향에 남았던 삼촌은 인민군으로 전선에 배치되었다 탈출하여 거제도 수용소에서 형님을 만났고, 그 후 석방되어 남한에 남았다. 하지만 인민군 출신이라는 딱지 때문에 늘 경찰의 감시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장래가 없다는 생각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아버지의 외삼촌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에 물들었다. 그 후 대구에 자리를 잡고 살다가 박정희 독재시절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인 아버지 외사촌은 부친이 정보부에 의해 린치를 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해방전후 한국의 지식층 가운데는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빠진 이들이 많았다. 빨갱이라기보다는 지주와 일제의 횡포 아래 핍박받으며 살던 민중을 깨우쳐 잘 살아보자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화자 고아리의 집안은 나와는 성씨가 같은 ‘고’ 씨다.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 고상욱은 내게는 먼 친척뻘 아저씨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결코 빨치산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 남자의 배경이 빨치산이었을 뿐이다. 격변의 시기에 서로 돕고 잘 살아보자고 애썼던 아버지의 이야기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낸 작가의 솜씨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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