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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11월 첫 주말

by 동쪽구름 2022. 11. 7.

세미(딸아이)네 가족이 오랜만에 놀러 왔다. 아이들 재롱에 정신을 놓고 있는데, 그레이스(작은 며느리)가 임신한 걸 알고 있냐고 딸이 묻는다. 모른다고 하니 순간 멈칫하더니 얼른 전화기를 집어 든다. 아마도 오빠에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묻는 모양이다. 잠시 후, 오빠가 내게 알려도 된다고 했다고 한다.

얼마 전 전화를 했을 때도 아무 말이 없었는데, 아마도 추수감사절에 만나면 이야기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축하 꽃이라도 하나 보내 주고 싶은데 생각해 보니 세미의 임신 소식을 듣고는 아무것도 보내준 것이 없다. 혹시라도 작은 며느리에게 꽃을 보내 준 것을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세미가 섭섭해할 것 같아 갑자기 고민스러워졌다. 성당 가는 길에 아내에게 의논을 하니, 쉽게 답을 준다. 넌지시 세미에게 의논해 보라고 한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답이 와 있다. 좋은 생각이라고 찬성에 한표 찍어 준다. 집에 돌아와 꽃을 주문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하지 않았나. 아이들이 많으니 이리저리 걸리는 일들도 많다.


평소 부부 함께 친하게 지내는 두 집이 있다. 개업한 지 1주년이 된 친구 가게의 돌잔치 겸 세 집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자주 만나는 사이지만 초저녁에 만나면 11-12시가 되어야 헤어진다. 어제는 모인 집에서 통 맥주를 준비해 그걸 비우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나이 든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 중의 하나는 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내용은 물론 대사와 제스처까지 마치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재생이 가능하다. 가게를 하는 친구의 레퍼토리는 어린 나이에 세무공무원이 되어 방석집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는 친구의 이야기다. 어제도 그는 그 친구의 이야기에 몰두했다. 이야기를 듣는 나는 차마 전에 들었던 이야기라고, 지난번에도 했던 이야기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중간중간에 고개도 끄덕이고 추임새도 넣는데, 역시 비디오라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서 추임새를 넣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럼 나라고 18번 레퍼토리가 없겠는가. 나 역시 “부익부 빈익빈”을 양산하는 자본주의와 잦은 선거로 그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

노인들은 이렇게 논다.


성당 우리 구역 반원인 할머니가 차편이 없어 성당에 나오기가 힘들다 해서 다섯 가정이 돌아가며 차편을 제공하고 있다. 오늘은 베로니카 씨 가정이 모시고 가는 날인데, 미사가 끝나고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할머니가 성당 근처에 있는 공동묘지에 있는 남편을 찾아가 기도를 하고 가겠다는 것이다.

묘지에 모셔다만 드리면 집에 갈 차편은 마침 그곳에 가는 다른 그룹의 교우들이 모셔다 드린다고 하더니, 그 사람들은 기도 후에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한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로라 씨가 모셔다 드린다고 해서 일단락되었다.

노인이 되면 자기중심적이 된다. 그래서 호의로 시작한 일이 쉽게 의무가 되어 버린다. 아침에 할머니를 모시러 집에 가면 드라이브 웨이에는 차가 세워져 있다. 미사가 끝나 모시고 가면 차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함께 사는 손녀딸의 차다. 하지만   차는 안 타느냐고 할머니에게 묻지는 않는다.

 

(주말이 시작되던 금요일 저녁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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