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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by 동쪽구름 2023. 4. 23.

성당에서는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그를 위한 ‘연도’를 한다. 참석자들이 기도문에 음률을 넣어 노래로 주고받으며 이어가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다. 선창과 리드를 할 사람이 없으면, 그냥 읽어도 된다.

 
코로나 펜데믹 이전에는 상을 당하면 회관에서 별도의 연도 모임이 있었다. 가족은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준비하고, 신자들이 모여 초를 켜고 망자의 사진을 앞에 놓고 연도를 드렸다. 연도가 끝나면 참석자들은 가족에게 위로의 말과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슬픔과 위로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회관에서 연도 모임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유일한 신자인 아내와 내가 연도 모임을 사진으로 찍어 형제들에게 보내주었다. 
 
코로나로 성당이 문을 닫자 상을 당해도 별도의 모임은 할 수 없었고, 연령회에서 카톡으로 신자들에게 각자 기도를 해 달라는 공지를 했다. 세상사라는 것이 시작하기는 힘들고, 끝내기는 쉬운 모양이다. 펜데믹 상황이 나아져 성당이 문을 열었지만, 더 이상 회관에서 별도의 연도 모임은 하지 않는다. 
 
상을 당한 그 주에 미사가 끝난 후, 성당에서 간단한 연도를 올린다. 순서대로 기도문을 다 포함한 연도를 드리자면 30-40분의 시간이 소요된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주일이라 다들 스케줄이 있고 바쁘니 그렇겠지만, 10-15분 남짓한 시간에 일부 기도문을 빼고 서둘러 끝내는 짧은 연도는 성의가 없어 보인다. 내가 상을 당한 가족이라면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암 투병 중이던 이냐시오 형제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한 달 정도 남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병을 다녀온 지 열흘 만에 우리 곁을 떠났다. 
 
10여 년 전,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얼마 되지 않은 나를 ME 피정에 데리고 갔던 형제다. 주일에 성당에서 짧은 연도가 있겠지만, 그렇게 떠나보내기에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ME 식구였던 스테파노와 야고보에게 우리끼리라도 모여 연도를 드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고맙게도 그러자고 한다. 
 
금요일 저녁 식사 후 우리 집에 모여 연도를 드렸다. 오랜만에 긴 기도문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했다. 길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기도문을 조금 서둘러 읽은 느낌이다. 정성을 들여 좀 천천히 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도를 드리고 나니 망자를 위한 기도라기보다 우리들의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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