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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미완성 연례행사

by 동쪽구름 2023. 5. 2.

사건의 발단은 3월 초 한통의 전화로 시작되었다. 옛 직장 동료인 ‘레너드’와는 가끔 안부전화를 주고받는다. 근황을 물으니, 요즘은 베벌리 힐스의 유대인 시니어 센터에 주 5일 나가 점심도 먹고 이런저런 활동을 한다고 했다. 한평생을 롱비치 교육구의 교사로 근무하다 은퇴한 그의 아내가 센터에서 클래스를 가르친다고 했다. 무슨 클래스냐고 물으니, 회고록/자서전 쓰기 강좌라고 했다.

 

언뜻 내가 영어로 써놓은 자전적 이야기 ‘My Story’가 생각났다. 이참에 그녀에게 부탁해서 감수를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해 놓은 원고를 이-메일로 보내며 천천히 시간 날 때 한번 검토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틀 만에 레너드에게서 통화를 하자는 메시지가 왔다. 전화를 하니, 토요일 하루 부부가 그 원고를 다 읽었다는 것이다. 레너드는 시력이 나빠져 아내가 읽어 주었다고 한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두 사람이 울고 웃으며 너무나도 감명 깊게 읽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꼭 출판을 해야 한다며, 영화 관련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작은 딸 ‘리사’에게 보여주어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당연하지. 

 

다음날 딸아이가 원고를 보고는 알고 있는 출판사에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내 소개서와 작품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적어 보내달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영어 원고는 일단 출판사에 전달이 되었다. 

 

레너드의 수선과 칭찬에 고무되어 이 참에 한글로도 출판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글 출판은 2021년과 2022년 이미 두 차례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다.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었다. 몇 군데 유명 출판사에서는 거절을 당했고, 몇 군데 출판사에서는 자비 출판이 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아내의 친구이자 내 첫 책을 기획 출판해 주었던 K에게 원고를 보내 부탁을 했다. 

 

나는 소장품으로 간직하기 위해 책을 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일단 발행한 책은 모두 누군가의 손에 들려 읽히기를 바란다. 자비로 책을 출판한 후, 일부는 서점에 유통을 하고 나머지는 장애인 단체 등에 기증을 해서 그 단체가 책을 팔아 기금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다. 이런 나의 생각에 부담을 느꼈는지, K는 자전적 이야기니 만큼 책을 내는 것에 의미를 두라고 했다. 출판하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는 책을 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을 접었다. 

 

이번에는 10 수년 전에 장애인 신문에 연재했던 글로 내 칼럼집 ‘지금 뭐 하슈’를 출간해 주었던 한국의 ‘방귀희’ 교수에게 부탁을 했다. 그녀에게 원고를 보냈더니, 이틀 만에 출판사 견적이 왔다. 막상 견적을 받고 나니 다시 생각이 깊어진다. 

 

지금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출판된 책이 반품되고 재고로 쌓여 폐지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어떤 경로로든 인쇄된 책은 모두 독자의 손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미국 출판사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다. 레너드의 딸 리사는 최근에 아기를 낳고 육아휴직 중이다. 당분간 기다려 볼 작정이다. 어쩌면 책 출간은 이번에도 해프닝으로 끝날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미완성 연례행사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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