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585 무라카미 T 중고책방에서 책을 둘러보다가 하루키의 책을 발견하면 무조건 바구니에 담는다. 나는 그의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나 잡문도 좋아한다. 하루키에게는 일상이 모두 글의 소재가 되는 모양이다. 무엇 하나 그냥 버리는 법이 없다. ‘무라카미 T’도 그런 부류의 책이다. 그가 LP판을 좋아하며 기회가 되면 여행지에서 중고 레코드 가게에 들러 LP판을 사서 모은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티셔츠도 모은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작정을 하고 티셔츠를 모은 것은 아니고, 이곳저곳에서 홍보용 티셔츠를 받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기념 티셔츠를 받고, 여행을 가면 갈아입을 옷으로 그 지역 티셔츠를 사고, 그러다 보니 서랍에 못다 넣고 상자에 담아 쌓아 놓게 되었다고 한다. 레코드 수집에 대한 .. 2025. 2. 21. 윈터 씨의 해빙기 은퇴를 앞둔 세무 공무원 윈터 씨는 꽉 막히고 편견 덩어리며 너무 깐깐해서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또한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밖에 없는 딸조차 그를 피한다. 이웃과도 교류가 없으며, 도통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화장품 회사 에이본의 뷰티 컨설턴트인 아내 소피아는 그와는 정반대로 타인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다. 이야기는 그가 소피아가 원하는 샴페인 대신 주유소 편의점에서 탄산 와인을 사들고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샴페인을 사러 나갔던 아내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며 윈터 씨의 일상은 180도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아내가 없는 세상,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그는 욕조 물에 헤어드라이어를 빠트려 감전사로 세상을 마감할 결심을 하고 욕조에 물을.. 2025. 2. 20. 돌배나무 돌배나무에 꽃이 피었다. 돌배나무와 인연을 맺은 것은 15-6년 전의 일이다. 지붕공사를 하며 지붕과 처마에 가지를 드리우는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막상 나무들을 제거하고 나니 빈 공간이 허전하고 그늘도 사라져 나무를 한그루 심기로 했다. 나무를 사려고 하니 생각보다 비쌌다. 어린 나무를 심어 몇 년 키우면 되지 싶어 홈디포에서 세일하는 나무를 사 왔다. 교우 S 씨 부부의 도움을 받아 심고, 식수 기념으로 버팀목에 사인까지 했다. 제법 큰 키의 나무를 싸게 판 이유가 있었다. 키는 사람만 한데 줄기는 가늘어 바람이 불면 심하게 휘청 거리는 것이었다. 몇 해가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후, 앞마당 공사를 하며 나무가 서 있는 자리에 콘크리트를 깔게 되었다. 나무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놈 .. 2025. 2. 19. 유화 (1) 목요일, 학교가 개강하는 날이다. 올 겨울 가장 큰 비폭풍이 오는 날이다. 비는 어제부터 오기 시작했다. 밤새 내리고 오전에도 비가 내렸다.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하루 결석을 할 수도 있지만, 6주 겨울 방학 동안 집에만 있었더니 좀이 쑤셔 가고 싶어졌다. 2:30분, 차가 왔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비는 학교에 도착하니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업시간까지는 20여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책방에 먼저 들렀다. 준비물을 사기 위해서다. 미술 클래스는 이것저것 필요한 재료가 많아 그 비용이 수강료보다 더 든다. 전에는 학교에서 미술용품 가게에서 기부한 기프트 카드를 주었는데, 작년부터 그것도 없어졌다. 대신 학교에서 책가게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를 준다. 지난 화요일, 책방에 갔더니 유화 물감을 .. 2025. 2. 15. 맥다방 점심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일이면 교회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하는데, 나는 주일이면 교우들과 맥도널드 (맥다방)에서 점심을 먹는다. 맥다방에서 점심을 먹게 된 사연을 설명하자면 긴 이야기가 되는데,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다니는 공동체는 학교 성당을 빌려 사용하기 때문에 별도의 식당이나 부엌이 없다. 일 년에 몇 차례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카페테리아 사용허가를 받아 캐터링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 한동안 구역 식구들이 커피와 다과를 준비해 와 미사 후 주자창 한쪽에서 나누다가 어느 날 맥다방으로 진출했다. 성당 근처 맥다방이 보수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열자 한 번 가보자 해서 간 것이다. 아늑한 공간에 앉아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시니어 커피까지 마시며 한참을 놀다 나왔다. 다음주가 되니.. 2025. 1. 31. 원더풀 라이프 책에는 “무력의 왕,” “한낮의 달,” “불초의 자식,” “가면의 사랑,” 4개의 이야기가 세 번에 걸쳐 전개되며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엔딩 크레디트”으로 끝이 난다. 무력의 왕 – 지진으로 중상을 입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아내를 돌보는 남자의 이야기다. 한낮의 달 –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 아내를 설득하여 일 년 동안 노력하지만 결국 아이는 생기지 않는다. 남편 가즈시는 아이는 포기하고 아내와 오손도손 살아갈 집을 직접 설계하고 지으려 한다. 설계한 집에 아이 방이 없는 것을 보고 아내는 입양을 할 테니 아이 방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불초의 자식 – 유부남 직장상사인 요지와 불륜을 맺던 이와코. 요지의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며 두 사람 사이는 멀어지는데,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임신을 하게 .. 2025. 1. 22. 이전 1 2 3 4 5 ··· 9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