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를 읽으며 다시금 하루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일상과 주변의 모든 것들이 글의 소재가 된다.
음악을 듣거나, 차 또는 술을 마시며 떠오르는 단상, 길을 가다 문득 눈을 들어 본 주변의 사물, 버스나 전철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지나가며 듣는 낯선 이들의 대화가 모두 글이 된다.
이 책에는 1984년 ‘Classy’라는 잡지가 창간된 때부터 이 년 동안 일레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와 연재했던 글과 그림을 모은 것이다. 하루키의 글만큼이나 미즈마루의 그림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의 절반은 글이고, 나머지는 그림이다.
하루키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으로 이 책에 실린 글을 썼고, 머리에 떠오른 것을 술술 써서 그대로 봉투에 담아 미즈마루에게 보내면 그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일러스트레이션도 글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주는 따스함의 문제,라고 리처드 브로티건은 어느 작품에 썼다.” (39 페이지) 나는 이 문장이 참 좋았다. 커피 한 잔이 주는 따스한 위로는 상투적인 동정의 말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학생시절 영어를 공부하던 하루키는 “모든 면도기에는 철학이 있다”는 서머싯 몸의 글을 외웠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반복해서 하면 철학이 생긴다는 뜻이라고 한다. 어른이 되어 바를 운영하던 그는 “모든 온더록스에는 철학이 있다”라고 생각하며 8년 동안 매일 온더록스를 만들었다. (226-227 페이지)
온더록스는 얼음을 깨는 방법 하나로도 품위나 맛이 달라진다고 한다. 얼음의 크기에 따라 녹는 속도가 달라, 큰 얼음만 사용하면 투박해서 멋이 없고, 작은 얼음이 너무 많으면 금방 녹아 물이 된다. 결국 대 중 소의 얼음을 조화롭게 섞고, 그 위에 위스키를 따른다고 한다. 세상사가 그렇지 않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균형이 맞아야 한다.
사 년 동안 죽어라 사용한 워크맨이 망가져 새것을 사게 된다. 신형 워크맨은 첫 번째 것에 비해 작고, 가볍고, 충전도 되며, 가격도 싸다. (254-255 페이지)
신형이 나올수록 품질은 좋아지며 가격이 떨어지는 유일한 것은 전자제품이 아닌가 싶다. 컴퓨터가 그렇고, TV도 그렇다. 오래전 내게도 워크맨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더라.
하루키, 늘 이야기하지만, 정말 대단한 작가다. 그가 쓴 글은 낙서나 메모조차도 짧은 에세이며 초단편소설 같다.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 읽어주는 여자 (2) | 2024.02.13 |
---|---|
마지막 악마의 죽음 (6) | 2024.01.24 |
수도원 기행 (4) | 2023.12.22 |
오디션 (3) | 2023.12.19 |
교환(The Exchange) (2) | 2023.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