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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잡문집

by 동쪽구름 2022. 8. 6.

한국 전쟁 전후로 태어난 내 또래라면 대부분 학창 시절 시작노트 한 권 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가을이면 학교마다 문학의 밤 행사가 있었고, 문예지를 발행하는 학교도 많았다. 아이들 키우며 정신없이 살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고 여유가 생기니 다시 글을 쓴다. 한국에도 글 쓰는 모임이 많이 있고, 이들을 상대로 등단의 기회를 주는 비주류 문예지도 많은 것으로 안다.

 

미주 한인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사는 남가주에도 이런저런 문학단체들이 많다. 매년 문예지를 발행하며, 신인상을 주어 문인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문인이란 딱지를 얻은 사람들은 팔리지도 않는 책을 자비로 출판해서 출판기념회를 한다.

 

한인신문에는 독자란이 있어 여기에 글을 발표할 수 있지만, 시를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은 극히 제한적이라 다들 산문을 쓴다. 그래서 모두들 자칭 수필가다.

 

나도 80년대 초반 잠시 이런 단체에 속한 적이 있었지만, 문학이라고 할 수 없는 글을 쓰며 문인이라고 행세하는 것이 싫어 발을 끊었다. 40여 년째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지만, 내 글을 수필이나 에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잡문일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은 1979-2010년까지 그가 각종 매체와 행사에서 발표했던 글을 모은 책이다. 길이가 무려 500페이지다. 아마도 딱 500페이지로 맞춘 것 같다. 역시 하루키답다.

 

다른 사람의 책에 써준 서문, 상을 받으면 했던 인사말, 음악에 관하여, 번역하는 것, 눈으로 본 것과 마음으로 생각한 것, 질문과 그 대답, 짧은 픽션, 소설을 쓴다는 것 등에 관한 잡다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는 라디오를 들으며 팝송을 접하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심야방송을 들으며 가끔은 사연을 적어 보내기도 하고. 조금 커서는 복사판 LP로 팝송을 들었다. 한국의 첫 FM 방송은 미 8군의 AFKN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FM 방송이 나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장만해서 미군방송을 통해 최신 팝송을 접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하루키가 그토록 대단한 작가인지 알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발표한 글을 모두 보관하는 모양이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에 발표한 글인지도 모두 밝혀 놓았다. 나는 80-90년대 써서 발표했던 글 중에 일부 스크랩은 남아있지만 아직도 원고를 가지고 있는 글은 없다.

 

그는 매일 오전에는 자기 글을 쓰고, 오후에는 번역일을 한다. 나는 왜 이미 번역되어 있는 책을 새로 번역해서 출판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을 보며 그 의문이 풀렸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도 변한다. 30-40년 전에 번역된 책은 그 시대의 언어와 정서로 번역된 것이라 지금 읽으면 어색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외국어 책은 새로 번역해서 한다는 것이 하루키의 생각이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그의 잡문집을 읽으며 나도 그동안 발표한 잡문들을 모아 책을 한번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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