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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퍼펙트 데이즈

by 동쪽구름 2024. 7. 29.

나이가 들어 좋은 것 중 하나는 시니어 디스카운트를 받는 일이다. 패스트푸드 매장을 비롯 영화관, 호텔, 항공사 등 많은 곳에서 10-15% 정도의 시니어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은퇴한 후, 85년에 졸업한 LAVC 대학에 재입학을 하니 학생증과 학생 이-메일을 발급해 주었다. 알고 보니 학생들이 받을 수 있는 할인혜택도 많다. 우선 아마존 프라임 멤버십을 절반 가격으로 가입했고, 스트리밍 서비스도 학생 할인이 있다. 그렇게 해서 월 $1.99에 Hulu에 가입했다. 

 

극장에 개봉했을 때 가보지 못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Hulu를 통해 보게 되었다. 영화 시작 전에 2분 광고가 있고, 중간에 2-3번 광고가 나오지만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광고는 초반부에만 나오고, 영화가 절반을 넘어가니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영화에 몰입한 관객을 배려하는 모양이다. 

 

주인공 ‘히라야마’의 하루는 매우 평범하며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예측이 가능한 단순한 루틴으로 이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부자리를 개키고, 키우는 식물에 분무기로 정성스레 물을 뿌린 후, 출근 준비를 한다. 쪽방을 나서며 집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한 모금 마신 후, 올드팝을 들으며 아침 해가 떠오르는 길 위로 청소 장비가 실린 차를 몰아 출근한다. 그는 화장실 청소부다. 

 

도쿄 곳곳의 공중 화장실을 돌며 구석구석 거울을 비춰가며 깨끗이 청소하고, 퇴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과 단골 술집과 책방을 오가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밤에는 잠들기 전 책을 읽는다. 작은 방 책장에는 문고판 책들이 가득하다. 휴일에는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현상하고, 찾아온 사진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찢어 버리고, 마음에 드는 것은 상자에 담는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불쑥 엄마와 다투고 집을 나온 조카가 찾아와 작은 변화를 준다. 조카를 통해 그에게는 누이가 있고, 그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보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며칠 조카와 함께한 그는 누이에게 전화를 걸어 딸아이가 자기에게 와 있음을 알리고, 그날 밤 누이는 운전기사가 모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찾아온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그가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었으며 병 중에 있는 아버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누이는 그에게 아버지도 많이 변했다며 한 번 가서 보라고 권하지만, 그는 고개를 젓는다. 조카와 누이가 떠나는 차를 보며 그는 흐느껴 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그는 단골 술집에 갔다가 여주인이 어떤 남자와 포옹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발을 돌려 나온 그는 편의점에서 맥주와 담배를 사서 물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워 물다 심하게 기침을 한다.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모양이다. 잠시 후 다가 온 한 남자가 그에게 담배를 청한다. 담배를 건네주자 불을 붙인 그 남자도 심하게 기침을 한다. 

 

남자는 그에게 자기는 술집 여주인의 전 남편이며 암에 걸려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던 것이라고 말하며 그녀를 부탁한다. 히라야마는 남자에게 자기는 그녀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진심은 아닌 듯 보인다. 

 

다음날 아침, 여느 때처럼 올드팝을 들으며 출근하는 그의 얼굴을 비추며 영화는 끝이 난다. 울듯, 하지만 울지 않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입가에는 잠시 미소가 떠오르다가 일그러지기를 반복한다. 만감이 교차하는 그의 심리를 보여 준다. 

 

나는 이 장면에서 그는 오지 말았어야 하는 길, 갔어야 하는 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중년의 나이쯤 되면 그런 기억을 갖게 된다. 꼭 후회는 아니더라도 아쉬운 순간은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아침에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개키고, 식물에 물을 뿌리고, 캔커피를 뽑아 한 모금 마시고, 올드팝을 들으며 출근해 화장실을 깨끗이 닦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나는 그가 술집 여주인과 사랑에 빠지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병든 아버지를 한 번은 찾아가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나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시 같고, 단편 소설 같은 영화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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