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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연필로 쓰기

by 동쪽구름 2022. 12. 15.

작가 ‘김훈’은 48년 생으로 나보다 7살 나이가 많다. 그 정도면 같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읽으며 그동안 잊고 지내던 시절을 잠시 뒤돌아 보게 되었다.

 

나만해도 벌써 20여 년 전부터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원고지에 연필로 쓰기를 고집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에서는 아날로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약간은 낡고 헌 것 같은 분위기지만 대신 여유가 있고 사람의 냄새가 난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명절이 되면 남들은 고향으로 가지만 그는 찾아갈 고향이 따로 없다. 나도 그랬다. 아버지가 단신 월남한 실향민이라 친척도 별로 없었다. 아버지의 외사촌과 외숙모가 홍제동에 살았는데, 설이 되면 아버지는 동생을 데리고 그 집으로 세배를 같다. 그 집에 가면 고향인 함경도에서 먹던 가자미식해나 동태 찜, 가자미 구이 등을 먹을 수 있었다. 

 

김훈의 어머니는 깍쟁이 서울 토박이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서울식 간장 떡볶이 먹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떡볶이를 먹으며) 

 

서울 토박이인 나의 외가는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어중간한 중인 집안이다. 고향 음식을 고집하는 아버지 탓에 우리 집 식탁에는 비릿한 생선과 얼치기 음식들이 많이 올라왔지만, 외가에서는 서울식 음식을 먹었다. 서울 음식은 식재료의 맛을 살려 간이 세지 않다. 국이나 찌개도 고추장이나 된장보다는 간장을 베이스로 한다. 김치에도 젓갈을 많이 넣지 않는다.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낸 나는 서울식 음식을 선호한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인분을 수거하던 시절이 있었다. 후에는 고무호스를 이용해 펌프로 인분을 수거했지만 그 전에는 긴 막대기에 깡통을 달아 그걸로 인분은 퍼서 통에 담아 똥차까지 날랐다. 물지게로 쓰던 바로 그런 통이다. 구청에서 보내주는 인분 수거 차가 정기적으로 와 주어야 하는데, 어떤 때는 제때에 오지 않았다. (밥과 똥) 

 

하도 오지 않아 내가 구청에 전화를 걸어 동사무소 직원인 척하고 빨리 인분 수거 차를 좀 보내 달라고 했던 일이 있다. 발신자 아이디 같은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이라 상대방을 확인할 수 없던 시절이다. 

 

그는 이순신과 박정희와 세월호에 관해서도 쓰고 있는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이나 판단보다는 그 시절을 살아 낸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강한 뉘앙스의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글은 좋아하지 않는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나라

… 동포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 

 

나는 지금도 가끔 이 노래가 생각이 난다. 김훈도 이 노래를 기억한다.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 군사정권은 건전가요를 부르게 했고, LP 판 마지막에는 이런 건전가요나 군가가 들어 있었다. (박정희와 비틀스) 

 

그는 자신이 받아들인 한국의 대중음악은 ‘신촌블루스’에서 끝났다고 한다. 나는 ‘G.O.D.’에서 끝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취향은 역시 세시봉 시절의 노래들이다. 

 

한국에서는 요즘 80대의 할매들이 한글을 배워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 할매들이 쓴 시는 하나같이 가슴을 울린다. 읽어보면 글 쓴 할매의 삶이 그대로 머리에 그려진다. (할매는 몸으로 시를 쓴다) 

 

어려울 때, 사회는 여성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없이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희생한다. 초경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농사를 짓다가 어린 나이에 시집가서는 코흘리개 시누와 시동생까지 거두며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그녀들은 한글 배울 여유가 없었다.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시골에서 올라온 10대 초반의 소녀들이 도시에서 식모살이를 했고, 조금 더 큰 여자아이들은 공장이나 식당에서 일을 했었다. 늦은 나이지만 글을 깨우쳐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할매들에게 갈채를 보낸다. 정말 축하할 일이다. 

 

냉면으로 시작한 글이 ‘백석’의 시로 이어지고, 고구려 벽화로 넘어가더니,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의 판문점 정상 회담에서 끝이 난다. (냉면을 먹으며)

 

영락없는 꼰대의 글이다. 나는 60이 넘으면 누구나 꼰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꼰대가 되면 말이 많아진다. 한 가지 주제로 시작한 이야기/글은 끝말 이야기하듯 앞글의 끝을 물고 다음 글이 나온다. 

 

꼰대는 정치 성향이나 노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세월의 산물이다. 나이가 들면 오줌발이 약해진다. 소변기 앞에서 위치 선정을 잘못하면 자칫 발등에 떨어질 판이다. 이때가 되면 아무리 신세대고 진보였던 사람도 꼰대다. 인생에 유아기가 있고, 청소년기가 있듯이 꼰대의 시간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꼰대라고 얕잡아 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그는 평양냉면의 맛이 “히스무레하고 슴슴하고 수수하다”라고 했다. 나는 꼰대의 글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훈의 글은 딱 이런 맛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글은 책 말미에 나오는 '해마다 해가 간다'는 글이다. 연말, 70넘은 친구들이 저녁 6시에 모여 녹두전에 술 한잔 하는 이야기다. 이들은 치매 요양원에 들어 간 친구, 암, 당뇨, 고혈압, 불면증,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친구들, 유방암, 자궁암 수술을 한 그 부인들의 소식을 나눈다. 그리고 70이 가까운 나이에 바람피우다 들통나 이혼한 친구를 욕한다. 어떤 친구는 바람피운 친구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8시가 되자 다들 마누라한테서 전화를 받고, 9시에 헤어져 집으로 간다. 70 노인들은 그렇게 한 해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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