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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카사노바 호텔

by 동쪽구름 2023. 1. 2.

‘아나 에르노’의 작품을 처음 읽어 보게 되었다. 프랑스 작가인 그녀는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카사노바 호텔’은 전체 길이가 127페이지인 매우 짧은 책인데, 그 안에 12편의 글이 실려 있다. 자전적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에세이와 소설들이다. 프랑스 작가답게 그녀의 글에는 프랑스 영화의 분위기가 있다. 무절제하고 방종한 듯, 다른 말로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다.

 

표제작 ‘카사노바 호텔’의 여자 주인공은 병원에 있는 어머니의 병이 급속히 악화되는 가운데 P라는 남자와 러브호텔에서 사랑 없는 정사에 열중한다. 그녀는 “쪼그라들어가는 어머니의 몸뚱어리를 견디자면 오르가슴이 필요했다”라고 말한다. 차츰 만나는 간격이 뜸해지다 헤어진 그를 어느 날 오페라역 승강장 맞은편에서 보게 된다. 그는 머리가 하얗게 센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사노바 호텔)

 

여주인공이 혼자 사는 어머니를 방문한다. “노인 사는 집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난다고 하던 어머니가 이제 노인이 되었다. 함께 식사를 끝내고 떠날 때가 임박해서야 어머니는 사회보장공단에 작성해서 제출해야 할 서류를 꺼내온다. 그녀가 가지고 가서 작성해 나중에 보내 주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잠시면 된다며 눈물을 쏟으려 한다. (귀환)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의 벤추라에 사셨는데, 어머니도 꼭 그렇게 하시곤 했다. 특별한 일도 없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떠나려고 하면, 이런저런 서류나 일거리를 꺼내 오곤 했다. 

 

새로 문을 연 우체국 건물 앞에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말끔히 면도한 얼굴에 알코올 흔적도 없고 상냥한 표정에 옷도 깨끗한 그는 우체국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준다. 사람들은 우표를 사고 받은 거스름돈을 그에게 준다. 그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한 어느 날, 주인공이 그에게 고용안정센터에는 등록을 했는지, 구청에는 가 보았는지 등을 묻자 그는 더듬거리며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다. 

 

그가 떠날 기약 없이 우체국 앞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필요치도 않은데 문을 열어 주는 친절도 더 이상 고마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더 이상 우체국 앞에 없음을 알게 된다. 다음날 차를 타고 나쇼날가를 지나던 주인공은 그가 빵집 앞 보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C 소재 우체국의 남자)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은 친구의 결혼 축하연에서 벌어진 일을 그린  ‘축하연’이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영화의 장면들이 그대로 머리에 그려진다. 

 

짧은 책이지만 다 읽고 나면 여러 편의 프랑스 영화를 본듯한 느낌이다.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 책이다. 아나 에르노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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