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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빈틈의 온기

by 동쪽구름 2022. 2. 1.

나는 작가 윤고은을 ‘EBS 북카페’의 DJ로 먼저 만났다. 물론 미리 준비한 원고를 사용하겠지만, 문학적인 느낌의 대본, 순발력 있는 멘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대손님을 이끄는 그녀의 진행에 금방 팬이 되었다.

 

그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이 영어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에 서둘러 도서관에서 영어판 ‘The Disaster Tourist’를 빌려 보았는데, 깊은 인상은 받지 못했다. 아마도 번역상의 어려움 때문에 윤고은 특유의 문체가 전달되지 않은 듯하다.

 

얼마 전 중고 책방에서 그녀의 산문집 ‘빈틈의 온기’를 발견하곤 그 자리에서 바구니에 담았다. 미국에서 책을 주문하면 DHL로 3-4일이면 도착한다. 이건 여담이지만 한국사람들은 책을 참 소중히 다루는 것 같다. ‘최상’ 또는 ‘상’으로 표시된 중고책들은 거의 새책과 다름없다. 미국 중고책은 새 책과 다름없다는 ‘like new’를 사도 헌책 표가 금방 난다.

 

‘빈틈의 온기’는 그녀가 일주일에 3-4번 전철을 타고 EBS를 오가며 메모했던 글들을 모아 만든 산문집이다. 이 책을 읽으며 왜 그녀가 인기 작가인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글은 잘 만들어진 칵테일, 또는 퓨전 음식과 같다. 낯선 듯 익숙하고, 지나 온 나의 기억들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간지러움이 있다.

 

나이로 따지면, 내게는 거의 자식과 같은 20년 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차이에서 오는 거부감이 전혀 없다.

 

프롤로그 – 그녀는 라디오를 듣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녹음 버튼을 눌러 카세트 데이프에 노래를 모으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프로를 들으며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했다. 때로는 중간에 DJ의 멘트가 들어가거나, 노래가 끝나기 전에 방송이 끝나는 일도 있었다. 

 

등은 밀수록 좋다 – 목욕탕에 갔다가 낯선 할머니가 이태리타월을 내밀며 등을 밀어 달라고 한다. 결국 그녀는 할머니의 등을 밀고, 반 강제로 할머니 손에 등을 밀리게 된다. 

 

난 대중목욕탕에 가 본 적이 없다. 어려서는 집에서 고무 다라이에 들어가 목욕을 했고, 조금 커서는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시장 근처의 여관에 가서 목욕을 했다. 여관방에 딸린 욕실에 들어가 동생과 함께 서로 등을 밀어주곤 했었다. 

 

올해의 오타상 – 그녀는 오타로 ‘찹쌀 순대’가 ‘찹쌀 군대’로, ‘공공 마스크’가 ‘공공 막걸리’가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난 메신저나 카톡을 보낼 때, 몇 번씩 검토를 한 후 보낸다. 그래도 가끔 오타가 그대로 보내져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상상력은 위대하다 – 그녀의 지인 C는 유럽에서 주차해 놓은 차가 굴러 가로등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로등을 들이받는 큰 사고를 내신 적이 있다. 구급차가 왔지만, 당황한 아버지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몸이 아픈 것을 깨닫고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1시간 넘게 차를 달려 아버지를 모시고 응급실로 갔다. 아버지는 1-2달가량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압도적인 식전 빵 – 식당에서 메인디쉬가 나오기 전 주는 식전 빵이 너무 맛있어, 빵으로 배를 채웠던 일, 하와이에서 칠리 축제에서 먹었던 맛난 칠리를 이야기한다. 

 

빵이 맛있는 식당들이 많다. 따끈하게 데워주는 빵은 대부분 맛있다. 나는 CPK에서 주는 사워도우와 아웃백의 꺼먼 밀빵을 좋아한다. 

 

오래전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캠핑 갔던 때의 일이다. 우리 옆자리에 어린 딸을 데리고 온 아빠가 있었다. 불을 피워 트라이팁을 구운 후, 도마에 올려 잘게 잘라 냄비에 삶은 콩과 넣어 칠리를 만들고 있었다. 냄새가 너무 좋다고 하니, 맛을 보라며 커다란 컵에 하나 가득 담아 주었다.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맛있다고 했더니, 한 그릇 더 주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준비해 갔던 라면과 구운 김을 나누어 주었다.

 

집이라는 앨범 – 그녀는 41년 동안 13곳의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나는 60여 년 동안 몇 군데서 살았던가. 한국에서 9곳, 미국에 와서는 6군데의 집에서 살았다. 어떤 집에서는 한 달 남짓 살았고, 지금 사는 집에서는 18년째 살고 있다. 

 

에필로그 – 그녀는 머리를 감을 때 생각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 역시 샤워할 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한때 신문에 매주 칼럼을 연재하던 때가 있었다. 대분분의 칼럼은 샤워를 하며 썼다. 몸을 말린 후에는 머리로 써 놓은 글을 옮겨 적고 다듬었다. 

 

다 읽고 나면 마음이 따스해지는 글들이 가득한 책이다. 그녀는 말만큼이나 글도 다정하고 재미있게 쓴다. 그녀가 쓴 소설도 찾아서 읽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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