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부부와 함께 며칠 전 89세 생신을 맞으신 작은 아버지를 뵙고 왔다. LA 동남부 리버사이드 카운티에 있는 신도시 매니피 (Menifee)에서 55세 이상 시니어들만 사는 주택단지에 20여 년째 살고 계시다.
작년에는 많이 아프셔 한동안 병원에 입원도 하셨었다. 그놈의 코로나 탓에 1년 넘게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나도 백신을 맞았고, 작은 아버지 내외분도 백신을 맞으셨다고 해서 갔다. 마침 간호사가 오는 날이니 조금 일찍 와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해서 토요일 아침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매니피는 우리 집에서 100마일이 넘는 거리며, 차로 2 시간 이상 걸린다.
가서 뵈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였지만, 내가 기억하는 작은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다. 작은 어머니는 늘 깔끔하니 멋도 내시던 분인데, 이제 완전히 노인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여 깜짝 놀랐다. 나이가 들면 다 비슷해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작은 아버지는 이제 귀가 심하게 어두워져 대화하기가 힘들다. 간호사가 묻는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집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으며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이라고 한다. 혈압을 재어보니 179가 나온다. 간호사가 깜짝 놀라며 약병을 검사하니, 수면제 약병은 많이 비었는데, 혈압약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약을 잘 챙겨 드시는 않은 것이다.
간호사 말이 작은 아버지에게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전달하면, 난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밤에 잠이나 잘 자게 수면제나 처방해 달라고 하신다고 한다. 원래 3월 24일로 호스피스 서비스를 종료할 예정이었는데, 혈압 때문에 2달 연장을 하겠노라고 하고 간호사는 돌아갔다.
하실 이야기가 많다며 두 조카며느리를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중간에 맥이 끊기기 일쑤고 이미 수십 번 들은 이야기다. 그곳에 머문 4시간 동안 같은 이야기를 2-3번 반복했는데, 어떤 이야기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재탕이요, 어떤 이야기는 할 때마다 내용이 달라진다.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다. 인민군으로 6.25에 참전해서 남한으로 탈출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포로수용소에서 몇 달을 보내다 국군 장교인 형님(우리 아버지)과 재회했으며, 인민군 출신이라는 딱지 때문에 남한 땅에 사는 것이 힘들어지자 60년대 미국으로 떠났다. 아들과 딸이 있지만 이혼하며 자녀들과 멀어졌고, 지금의 작은 어머니와 재혼해서 40여 년째 잘 살고 계시다.
손재주가 좋아 뭐든지 잘 고치고 만든다. 다우니에 있던 집은 기둥만 남겨두고 하나씩 고쳐 완전 리모델링을 했을 정도다. 농사도 잘 지어 과히 크지 않은 뒷마당에 밭을 일구고 유실수를 심었는데, 집에서 농사지은 것이라고 할 수 없이 실한 소출이 나왔다. 상추 철에 가면 상추 잎을 따서 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슈퍼에서 파는 것처럼 커다란 놈을 툭 잘라서 준다.
작은 아버지가 건강하실 때는 가끔 채소며 과일을 담은 상자를 몇 개씩 우리 집까지 배달도 해 주셨고, 몇 년 전부터는 작은집과 우리 집 중간쯤 되는 지점의 식당에서 만나 밥을 먹고 과일과 채소를 받아 오곤 했었다. 어제 보니 그 실하던 텃밭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나무들도 전지를 해주지 않아 이발 못한 총각의 더벅머리 모습을 하고 있다.
그동안 타던 차를 팔아 돈이 있으니 마음 놓고 비싼 것 먹으라며 지갑에 든 백 달러짜리 지폐들을 보여 준다. 악의 없는 큰소리 허풍은 여전하시다. 점심은 동생이 샀다.
사놓았던 묘지도 팔았다고 한다. 돌아가시면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들어준 3 천불짜리 생명보험이 있으니 그걸로 화장을 해 달라고 하신다. 작은 아버지가 우리 집안의 마지막 어른이다.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세대는 이제 막을 내리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 결국 이렇게 살다가는 것이 인생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창밖은 아직 석양인데, 마음에는 벌써 어둠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