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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안녕 주정뱅이

by 동쪽구름 2020. 12. 17.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실린 소설들의 공통점은 술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독특한 발상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소설이란 결국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WHO 가 2011년 발표한 국가별 알코올 섭취 순위를 보면 한국은 성인 한 명당 14.8리터로 188개 회원국 중 13위였다. 한국에서는 와인이나 맥주보다는 알코올 함량이 상대적으로 높은  증류수 (소주)를 선호하며 증류수의 소비량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2017년 소주 판매량은 총 36억 병으로, 국민 1인당 70병의 소주를 마신 셈이다. 

 

이곳 미국에서도 코로나 이전 한인타운의 국밥이나 족발집에서 점심시간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테이블이나 빈 국밥 뚝배기 옆에 놓인 반 병쯤 남긴 소주병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봄밤 – 늦은 나이에 만나 사랑했던 연인 영경과 수환의 슬픈 이별 이야기다. 영경은 알코올 중독을 떨쳐 버리지 못하며 결국 수환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 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삼인행 – 헤어지기로 한 부부와 그들의 친구가 함께 떠난 1박 2일의 여행. 어쩌면 그 부부는 헤어지고 나서고 가끔 이렇게 만나 맛난 것을 찾아가 소주잔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모 – 가족을 위해 결혼도 포기하며 살다가 어느 날 모든 연을 끊고 홀연히 사라졌던 남편의 이모가 암 선고를 받고 다시 돌아온다. 그녀는 처음 본 조카며느리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함께 한다. 때로 우리는 상처와 앙금을 나누지 않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싶을 때가 있다. 

 

카메라 – 세상사에 원인 없이 생겨나는 일은 없다. 때로는 의도치 않았던 일이 누군가의 생을 결정하고 운명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역광 – 예술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한 신인 소설가와 시력을 잃어가는 인기 작가 위현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다음 해, 위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실내화 한 켤레 - 경안이 동창인 혜련과 선미를 14년 만에 만나 추억을 회상하며 그들과 술을 마시고 지낸 며칠 간의 이야기다. 표면에 남은 지난 세월은 그리움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안을 들추어 보면 어린 악마들의 모습이 숨겨져 있기도 하다. 철없이 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 철없음이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 만난 이들은 알고 있는 비밀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다시 헤어진다. 

 

층 – 세상은 계급과 등급의 사회다. 몇 사람이 모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순서가 정해지고, 당연히 남녀, 빈부, 연령 등이 순서를 정하는데 기여한다. 나보다 순위가 앞선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고, 다소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한다. 그래야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으니까.

 

가볍게 읽히지 않는 소설집이며, 다 읽고 나면 긴 여운이 남는다. 나는 덮고나도 아무 느낌이 남지 않는 책 보다 이런 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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