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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공무원과 자살

by 동쪽구름 2020. 12. 8.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책을 사게 되면 책을 열어 볼 수 없기 때문에 가끔 전에 읽은 책을 사게 된다. 장강명의 장편소설 ‘표백’을 그렇게 해서 다시 읽게 되었다. 책을 펼치니 언젠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은 나는데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았다.

 

작가가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긴 하지만, 내가 평소에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인 한국의 공무원 시험과 자살이 등장하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었다.

 

서울의 A 대학에 재학 중인 주인공은 어느 날 술자리에서 평소 친하지 않은 휘영, 병권, 미모의 세연을 만나게 된다. 그들과  어울리며 세상은 이미 '완성된 세계'이며, 청년들은 수능을 잘 보거나 토익 점수를 잘 받아 출세하는 것 외에는 딱히 이룰 것이 없다는 허무를 자각하게 된다.

 

그 후, 세연을 통해 '추'를 만나 사귀게 되고, 그는 7급 공무원을 시험을 준비한다. 세연은 의문의 압축 파일을 남긴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세월이 흘러, 나는 시험에 합격하여 7급 공무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헤어졌던 연인 추의 죽음으로 세연이 시작한 것으로 의심되는 자살 음모가 불거지게 되고, '와이두유리브닷컴'이라는 자살 사이트가 나타난다. 그녀의 압축 파일에서 세연이 모두에게 자살을 종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추는 물론이고 앞서 죽었던 재벌 3세도 그녀의 계획에 따라 자살한 것으로 밝혀진다. 

 

자살 사이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고, 세연을 짝사랑했던 병권이 서강대교에서 목을 매고 죽는다. 이들의 자살 규칙은 실패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성공했다'라고 할만한 위치에 도달한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 남들이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별 의미도 없는 시시한 일에 불과하다고 죽음으로서 역설하는 것이다. 

 

2020년 코로나 사태로 경쟁률이 다소 떨어졌다고 하지만 9급 국가직 공무원 시험에는 선발예정인원 4,985명에, 185,203명이 원서를 접수하여, 경쟁률 37.2를 기록했다. 

 

“하급 공무원은 사무관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사무관은 국/과장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국/과장은 실장과 차관, 장관 눈치를 살펴야 하고, 장관은 청와대와 여론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214 페이지)

 

이 책이 출간되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을 새워 공부하고 수능을 보아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다시 고시원에 들어가 몇 달, 몇 년씩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나는 캘리포니아 주 공무원으로 31년 근무했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 따로 시험공부를 한 적도 없다. 공무원 시험은 기본적인 영어 독해 능력과 쉬운 수학 문제 정도였고, 일단 필기시험에 합격하면 채용에 필요한 점수는 면접으로 정해진다. 실무에 필요한 교육은 채용 이후에 이루어진다. 각 부서에서 필요한 교육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의 일반행정직 9급 시험은 행정학개론, 사회, 과학, 수학, 행정법 총론, 등 5개 과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르긴 해도 한국의 공무원도 일단 채용이 되면 부서에 따라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구청의 사무직원이 과학 지식이나 행정법 총론에 밝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험에 떨어지는 36명은 어디 가서 써먹을 수도 없는 공부를 해야 하는 셈이다. 청춘의 희생이며, 쓸데없는 인력낭비다.

 

“자살 선언은... 가장 극단적인 저항 운동이다.” (207 페이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자살의 의미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자살은 사회적 또는 정치적 사건이 터지면 누군가 죽어버리는 일이다. 내 한 몸 죽는 일로 나의 가족이나 주변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는 협박성 죽음이다. 이런 자살은 죽은 이들의 의도대로 간다. 그가 저지른, 또는 그와 관련된 모든 일들은 죽은 이들과 함께 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다.

 

표백은 2011년 240여 편의 경쟁작을 물리치고 제16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북 카페’에 초대 손님으로 나온 작가의 방송을 들었고, 신문에 쓴 그의 칼럼을 읽었다.

 

칼럼에서 그는 요즘 문창과 출신도 아니고 전업작가도 아닌 일반인들이 책을 내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책에는 그들의 삶이 녹아 있기 때문에 이들이 쓴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표백을 읽고 나서, 그가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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