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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93

작은 이별들 나이가 들며 겪는 일 중의 하나는 나와 익숙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 일이 아닌가 싶다. 시작은 몇 년 전 내가 20년이나 단골로 다니던 자동차 정비소의 주인 ‘밥’이 갑자기 사라진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10-15만 마일이나 된 10년도 넘은 낡은 차들을 마음 놓고 타고 다녔던 것은 순전히 그의 덕이었는데, 어느 날 가보니 자리에 없었다. 아파서 병원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웃집 주유소 주인에게서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암을 너무 늦게 발견했다고 한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새로운 정비소를 찾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딜러에 다니고 있다. 두 번째 이별은 내 주치의였다. 그는 머리가 빠져 훤하게 드러난 이마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머리숱이.. 2021. 5. 26.
습관의 힘 지난 2월 사순절을 시작하며 코로나 탓에 성당에 나가지는 못하지만 나름 의미 있는 40일을 보내자는 생각을 했다. 남들은 사순시기에 평소에 아끼고 좋아하는 일들 중 한 가지를 포기하거나 중단하며 절제의 시간을 갖는다고 하는데, 나는 이제껏 그래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고 끊기 힘든 인터넷 바둑을 중단하기로 했다. 10여 년째 거의 매일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어왔다. 가족들에게 사순 기간 바둑을 끊기로 했다고 선언하니, 다들 “그래?” 하는 눈치다. 며칠이나 가겠나 하는 표정들이다. 실제로 며칠 후 약간의 금단현상이 오기도 했고, 가족들이 모두 집을 비운 시간에는 아이패드를 앞에 놓고 흔들린 적도 있다. 부활절이 다가오자 조카딸 ‘민서’가 “부활절이 지나고 나면 다시 바둑 두.. 2021. 4. 30.
봄이 좋아졌다 어려서는 가을과 겨울을, 낮보다는 밤을 좋아했다. 아마도 인생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구르며 내는 소리,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좋았다. 모두가 잠든 밤, 램프를 켜고 음악 방송을 들으며 한 소녀에게 편지를 쓰곤 했었다.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다 버리고, 어떤 것은 부치지도 못하고. 이놈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7-8년 전의 일이다. 연두색 풀 속에 노란 꽃이 몇 개 보이더니 그 후 매년 아래로 내려오며 숫자가 늘어났다. 3-4년 전, 비가 많이 왔던 봄에는 뒷동산 가득 피기도 했었다. 금년에는 날씨가 가물어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3월 상순 몇 차례의 비에 뒷동산이 초록으로 변하더니 며칠 전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다. 매일 그 숫자.. 2021. 3. 28.
존엄한 죽음 코로나로 시작한 칩거도 이제 2년 차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책과 영화를 가까이하게 된다. ‘수잔 서랜든’ 주연의 영화 ‘완벽한 가족’(Blackbird)를 보았다. 루게릭병에 걸려 이미 한쪽 팔은 쓸 수가 없고 다리도 불편한 중년 여성 ‘릴리’가 더 이상 병세가 악화되기 전에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하고 두 딸과 그들의 가족, 절친을 집으로 불러 때 이른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녀가 큰딸의 아들인 손자와 나누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손자가 “할머니, 어른이 되어 중요한 순간에 유용하게 쓸만한 삶의 지혜 같은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라고 말하자, 그녀가 답한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뭐 대단한 통찰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척 하지만, 그런 건 없어. 생은 그냥 살아보아야 .. 2021.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