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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

낯선 것에 익숙해지기까지

by 동쪽구름 2020. 8. 18.

수년 전의 일이다. 한국에서 손님이 다녀갔다. 그중 한 사람이 수년 전 내 책을 편집해 주었는데 친구 두 명과 함께 휴가차 미국에 온 것이다. 마침 일행 중 한 사람의 후배가 패서디나에 살고 있었다. 1주일 머무는 동안 내가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고작 3일이다. 

난 무언가 재미있고 기억에 남고 그리고 미국을 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고민한 끝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게티 뮤지엄을 선택했다. 차로 이동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먼길을 돌아가기도 했지만 짧은 시간에 과연 어떤 인상을 받고 갔는지 궁금하다. 

그녀들과 며칠을 함께 다니며 나는 나대로 한국을 떠난 20여 년이란 세월이 가져다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두 번째 만난 날 한 친구가 하는 말이 내가 하는 말 중에 가끔씩 낯설고 낡은 표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시계는 1981년에 머물러 있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은 2005년을 지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건만 나는 잠시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나는 미주의 한인 TV에서 방송되는 '개그 콘서트'와 '폭소 클럽'을 매주 빼놓지 않고 본다. 그런데 가끔 도대체 왜 저런 대사가 나와야 하는지, 왜 이런 것이 재미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한 예로 '살인의 추억' 이란 영화를 본 후에야 왜 '향숙이' 이야기가 개그 콘서트에 등장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작고 아담한 한국의 것들에 비해 무엇이나 멋없이 크기만 한 미국적인 것들은 그녀들에게 낯설게 느껴진 듯하고 서양 음식에 대한 거부감으로 고생을 한 듯 싶다. 

문득 내가 미국에 처음 와서 겪었던 문화적 충격이 생각난다. 난 치즈가 든 것은 모두 냄새가 나서 싫었다. 맥도널드에서 내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메뉴는 치즈를 넣지 않은 '쿼터 파운더' 햄버거였다. 

미국에 오던 첫해 겨울, 크리스마스 연휴에 친구들과 차를 타고 유타에 갔었다. 그곳에 살던 한 친구의 이모님 댁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메뉴는 칠면조 고기를 다져 넣은 물만두였다. 그날 나는 저녁을 거의 먹지 못했다. 칠면조 고기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가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치즈와 칠면조 고기를 '서양사람'  냄새로 기억하며 멀리했었다. 

요즘 내가 점심에 외식을 하며 즐겨먹는 메뉴는 터키 샌드위치다. 밥때가 되기 전에 출출하면 치즈를 잘라 크래커에 얹어 먹기도 한다. 세월의 무서움이라니…. 어쩌면 내가 미국 생활에 적응한 만큼 떠나온 고국의 정서와는 멀어진 것이 아닌가 싶어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든다. 

마지막 날 우리는 말리부 바닷가에서 함께 석양을 보았다. 그녀들은 몇 시간 후면 돌아가게 될 서쪽 바다를 보았고 나는 너무 오래전 떠나온 서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가 떨어지고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는데 해변 구조대의 빈 망루 주변으로 갈매기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중 한 친구는 영 발이 안 떨어지는지 그 모습을 담아가려고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옷을 벗는 낙엽수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겨울비가 오고 나면 아마도 훨씬 더 많이 늘어날 것이다. 유난히 고향 하늘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12월의 파란 하늘 위로 비행기가 긴 비행운을 남기며 날아가고 있
다.

 

(이 글은 내게는 특별한 글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내 지인의 친구가 그 후 나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이라니.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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