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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by 동쪽구름 2023. 5. 9.

인터넷 중고책방에서 책을 둘러보던 중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담배를 깊이 빨고 있는 중년 여인의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다. 그녀의 표정에 숨겨진 이야기가 책에 들어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만난 책이 시인 ‘최승자’의 에세이 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다.

 

여고 시절 학교 수업이 끝나고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가끔 그녀는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경인선 기차를 타고 연안부두도 갔다. 방파제에 늘어선 노점상들은 조가비나 산호로 만든 기념품을 팔았다. 넘어가는 해의 마지막 붉은빛을 받으며 바닷물결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크고 작은 배들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찾은 그곳에서 그녀는 크게 실망한다. 방파제 위 노점상들은 온데간데없고 그곳에는 술 파는 포장마차와 죽어가는 물고기들이 흐느적거리는 수족관을 하나씩 갖춘 횟집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줄지어 들어선 여관들. 길가에는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아저씨들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이곳은 못 올 곳이 되었구나 하는 마음으로 돌아선다. (머물렀던 자리들) 

 

대학에 갓 들어갔을 때 한 노교수가 그녀를 ‘미스 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미스 아무개라는 호칭이 술집 아가씨를 부를 때처럼 뭔가 불순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미스나 아가씨라는 호칭에 익숙해졌고, 얼마 뒤에는 과일가게 아저씨나 채소가게 아줌마에게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라고 불리는 과도기를 지나 확고한 아줌마가 된다. 

 

그다음으로 그녀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이다. 첫 시집을 내고 얼마 후 이따금 독자의 전화나 편지를 받기 시작하며 선생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호칭에 관하여) 

 

그러고 보니 나도 여러 개의 호칭을 거쳐왔다. 갈빗집을 하던 우리 집에는 늘 여러 명의 종업원이 있었다. 주방에는 아주머니가 홀에는 내 또래의 나이 어린 여종업원들이 있었다. 난 그들에게 ‘학생,’ 또는 ‘총각’이라고 불렸다. 

 

주 공무원에 되어 LA 사무실에 가니 직원 중에 한국 아주머니가 한분 계셨다. 그분은 나를 ‘고씨’라고 불렀다. 이유인즉,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미스 또는 미스터 아무개’라고 부르지만, 미국에서는 존칭의 의미로 사용된다. 가까운 사이에는 나이나 직위와 상관없이 이름을 부른다. 나를 ‘미스터 고’라고 부르면 주위에서 좀 이상하게 볼 것 같아 ‘고씨’라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며 나도 ‘아저씨’와 ‘선생님’을 거쳐, 이제는 ‘어르신’이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프라하 시내를 관통하는 강을 떠다니는 유람선을 탄다. 배를 따라오는 오리들을 보며 어쩌면 저렇게 유유자적하고 가볍고 편안해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하던 그녀는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쉴 새 없이 바지런히 노 젓고 있는 다리들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 후 그녀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로움을 그리기보다는 날갯짓의 중도동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새에 대한 환상) 

 

1994년 아이오와대학의 초청으로 4개월간 미국에 체류했던 그녀는 그 후 신비주의에 빠져 들어 5년 동안이나 그에 대한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정신분열증을 앓게 된다. 2016년 나온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이후 새로 나온 책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산 책은 2022년에 나온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의 개정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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