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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

꽃피는 봄에

by 동쪽구름 2023. 2. 11.

그놈들이 돌아왔다. 음력 설이 빨라 금년에는 봄이 일찍 올 것을 예상했는데, 역시 절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음력설이 지나자 바로 그놈들이 얼굴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놈들이란 우리 집 뒷동산에 피는 금잔화들이다.

 

우리 집은 뒤로는 집들이 없이 나지막한 언덕이며 나는 이 언덕을 뒷동산이라고 부른다. 그곳에는 이런저런 이름 모르는 풀과 옆집에서 슬금슬금 넘어온 선인장, 그리고 야생 해바라기가 자란다. 금잔화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0년쯤 전의 일이다. 어느 해 봄, 느닷없이 언덕 윗자락에 꽃이 피었다. 새들이 날아온 씨앗이 싹을 튼 것인지, 아니면 언덕 위 어느 집에서 내버린 씨앗인지 알 수 없다. 

 

한번 발을 들여놓더니 매년 옆으로 아래로 조금씩 영토를 넓혀 이제는 아래위로 가득하다. 몇 년 전 비가 많이 내리던 봄에는 정말 볼만했었다. 그 후 몇 해 동안은 겨울에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어 봄이 되어도 버짐 먹은 아이의 머리처럼 듬성듬성 나곤 했다. 지난겨울 내린 비에 마침내 제 세상을 만난 것이다. 

 

처음에 한두 개 발견하고 나면, 그 주변을 시작으로 마치 팝콘 터지듯이 매일 기하급수적으로 그 수가 늘어난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아침 다르고 저녁이 다르다. 

 

계절이 바뀔 때면 계절풍이 부는데, 봄에 부는 바람은 확실히 가을바람과는 다르다. 가을에 바람이 불면 여름내 뜨거운 햇살에 마르고 거칠어진 가지에 달린 나뭇잎들은 찢겨 떨어져 바람에 날린다. 캘리포니아의 봄은 나무보다는 풀이 먼저 알고 싹을 틔운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뒤동산에는 초록 풀과 알록달록 금잔화가 일사불란하게 물결친다. 풀 사이로 고개를 빼고 피어 있는 야생화는 마치 저 혼자 공간에 떠 있는 것 같은 입체감을 준다. 

 

따스한 바람에 꽃과 풀은 물결치고, 새들은 지저귀며, 구름 한 점 없는 코발트 빛 하늘에는 높이 뜬 비행기가 가늘고 긴 비행운을 남기며 어디론가 날아간다.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멍” 때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별이나 외로움 따위의 쓸쓸한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라고 했던 모양이다. 

 

아직 잎도 나지 않은 복숭아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작은 아버지가 심어 주었던 나무다. 이런 봄에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인민군의 일원으로 전선에 나와 있던 작은 아버지는 형님이 남한의 국군 장교라는 사실이 알려져 감시 대상이 되자, 종전을 앞두고 부대를 탈출해 남한으로 투항했다. 그 후, 포로가 되었다가 남한에 남았지만, 인민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결국 미래가 불투명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작은 아버지를 끝으로 우리 집 실향민 세대는 모두 돌아가셨다. 북한 땅에는 만나본 적 없는 사촌들이 살고 있다. 원론적으로는 통일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더 이상 통일은 내게 절실하지 않으며 큰 의미도 없다. 

 

작은 아버지는 미리 화장 패키지를 마련해 두셔, 이달 중순에 화장이 끝나면 바다에 나가 재를 뿌릴 것이다. 그때쯤이면, 우리 집 뒷동산의 금잔화는 절정에 이를 것이다. 부디 꽃피는 고향에서 먼저 가신 부모 형제를 만나 편히 쉬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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