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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

사순시기를 끝내며

by 동쪽구름 2023. 4. 14.

성당에서는 사순시기를 마감하고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하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에서 신부님이 무릎을 꿇고 신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세족식을 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함이다.

 

세족식 참석 인원은 예수님 살아생전의 제자수인 12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자 수가 많은 큰 성당에서는 하고 싶어도 세족식에 참여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선택되면 그건 은총이며 축복이다. 

 

내가 다니는 성당은 매주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 수가 1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성당이다. 그래서 웬만한 신자들은 모두 한 두 번은 세족식에 참여해 보았다. 신부님에 따라 세족식에 참여하는 사람을 정하는 방법도 다르다. 미리 정해 놓기도 하고, 제비를 뽑기도 하고, 원하는 신청자를 받기도 한다. 쉽고 흔하면 귀한 줄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어느새 우리들에게 세족식은 그저 흔한 연례행사가 되어 버린 듯싶었다. 

 

금년 세족식에서는 신부님이 새로운 방법을 택하셨다. 그날 저녁 미사에 온 모든 신자들이 발을 씻고 발 씻김을 받았다. 먼저 12명의 발을 신부님이 씻겨 주시고, 발 씻김을 받은 12명이 무릎을 꿇고 다음 12명의 발을 씻겨 주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고 어색해하던 신자들이 세족식이 끝날 무렵에는 모두 감동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는 가족이라도 남의 발을 씻겨 주기는 쉽지 않다. 낯선 이의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말려 그 발에 입을 맞추며 짧은 순간이지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주일에는 미사를 마치고 투병 중에 있는 교우 K형제의 문병을 다녀왔다. 그분의 아내로부터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뇌종양 탓에 그가 우리 일행을 알아보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나 역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어눌하게 말하는 그가 내가 알던 K형이라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나를 번쩍 안아 차에 태워 ME 피정에 데려다주었던 그가 아니던가. 늘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호탕하게 웃던 그가 아니던가. 자꾸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부인이 곁에서 통역을 해 주었다. 

 

월남참전 용사며 국가유공자인 그의 방에는 감사장과 사진이 가득했다. 뇌신경이 눌린 탓에 그는 과거와 현재를 잘 구별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은 이럴 때 그 본성이 나오는 것 같다. 우리를 알아본 그는 한 사람씩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에 없는 다른 교우들을 부탁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가 가는 길은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이다. 그날 나는 이쪽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쪽에 눕고 누군가 이쪽에서 나를 위로할 것이다. 과연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칠 것인가. 

 

돌아오는 길, 들판에는 야생화가 피어있고, 날씨는 더워 에어컨을 켜고 왔다. 봄은 시작되었는데, 누군가는 우리 곁을 떠나려 한다.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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