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마구’의 장편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 후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굳이 전편을 보지 않아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별 지장은 없다.
4년 전, 모든 사람이 눈이 머는 ‘백색 실명’ 사태를 겪었던 나라에 선거가 있었다. 개표 결과, 놀랍게도 80% 이상의 표가 백지로 밝혀지자, 정부는 수도인 이 도시를 탐탁지 않게 본다. 정보요원을 풀어 사람들에게 '백지투표'를 하게 된 이유를 물어보지만,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붙잡아 거짓말 탐지기로 누가 백지투표를 했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수사를 하는 정보요원마저도 백지투표를 했다는 결과가 나오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도시를 떠난다. 군도 경찰도 없는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정부의 기대와 달리 사람들이 계엄령과 무관하게 평소처럼 잘 지내자 일부 정부 각료가 지하철에 폭탄을 설치하고 폭도들이 꾸민 것으로 속이려 한다. 시민들은 이 일을 벌인 것이 정부라는 것을 알고는 그들을 비난한다.
정부는 백색 실명 사태를 백지 투표에 연관시키려고 3명의 경찰을 도시로 보낸다. 마침 실명 사태 때 눈이 멀지 않은 여인이 있었고, 그녀가 사람을 죽였다는 제보가 들어온다. 의사의 아내였던 그녀는 식량 배급 라인을 강탈하고 여성들을 집단 강간하던 불량배 집단의 우두머리 남자를 죽였던 것이다.
정부는 그녀에게 백지 투표 사태의 책임을 씌우고자, 파견한 경찰들에게 증거를 수집하라고 한다. 하지만 수사를 할수록 그녀가 이번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부의 음모를 알게 된 수사관 중 한 사람인 경정은 정부 편이 아닌 작은 신문사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린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 기사가 실리지만 오전에 정부가 이 기사가 실린 신문을 모두 수거한다. 오후가 되자 기사를 복사한 것이 시중에 나돌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여인은 백지 투표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고, 저격범의 손에 살해된다. 경정도 죽음을 맞게 되지만, 정부는 사건을 해결한 그가 불순한 집단의 손에 죽음을 당한 영웅으로 발표한다.
책을 읽으며 곳곳에서 내가 살아오며 보고, 듣고, 경험했던 일들과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국민을 속이기 위해 정부가 음모를 꾸미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일은 한국이나 미국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언론을 장악해서 진실을 은폐하는 일,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씌우는 일도 그렇다. 용기를 내어 양심선언을 하고 진실을 밝힌 사람은 박해를 받고, 때로는 죽음을 맞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일들은 지금도 알게 모르게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작가 사라마구는 백지 투표를 주제로 삼아 불합리한 선거제도, 민주주의의 몰락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지방선거 투표율은 50%도 되지 않는다. LA 지역의 경우, 최근에 있었던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소환 선거는 43.9%, 2020년 대선 예비선거는 38.3%에 지나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정치 노선에 따라 진보 또는 보수로 갈려, 상대편이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선거는 20%도 안 되는 소수 계층과 부동표로 결정이 난다. 선거를 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을 정한 표는 백지 투표와 다를 것이 없다.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내세우고, 아직 들어오지 않는 미래의 세금 수입을 담보로 빚을 내어 선심공세를 편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먼저 가야 할 돈이 유권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모든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코로나 사태를 맞아 정부가 지급한 부양금도 그렇게 나누어졌다. 미국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전보다 살림이 더 나아진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민주주의의 부조리와 부패한 정부의 부당한 폭력을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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