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는 가을과 겨울을, 낮보다는 밤을 좋아했다. 아마도 인생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구르며 내는 소리,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좋았다. 모두가 잠든 밤, 램프를 켜고 음악 방송을 들으며 한 소녀에게 편지를 쓰곤 했었다.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다 버리고, 어떤 것은 부치지도 못하고.
이놈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7-8년 전의 일이다. 연두색 풀 속에 노란 꽃이 몇 개 보이더니 그 후 매년 아래로 내려오며 숫자가 늘어났다. 3-4년 전, 비가 많이 왔던 봄에는 뒷동산 가득 피기도 했었다. 금년에는 날씨가 가물어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3월 상순 몇 차례의 비에 뒷동산이 초록으로 변하더니 며칠 전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다. 매일 그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다.
꽃씨가 잔디밭에 떨어졌는지 얼마 전에는 마당에도 꽃이 있었는데, 가드너가 와서 잔디를 깎으며 싹둑 잘라버렸다. 풀이 꽃밭에서 자라면 꽃이지만, 잔디밭에서 자라면 잡초가 되어 버린다. 사람이나 꽃이나 있어야 할 곳을 잘 알고 자리를 잡아야 한다.
아내가 가지치기를 한 복숭아나무에도 꽃이 달렸다. 마치 팝콘이 터지듯이 매일 자고 일어나면 새 꽃망울을 터뜨린다. 겨우내 어디에 가 있었는지 흔적도 없던 새들도 하나둘씩 돌아왔다. 가만히 들어보면 5-6가지 다른 새소리다.
아침을 여는 것은 새들의 노랫소리다. 쉬지 않고 재잘대던 놈들이 다들 먹이를 찾아 둥지를 떠나고 나면, 조용한 뒷동산은 따스한 아침 햇살에 잠기고, 꽃들이 잠을 깬다.
주변을 둘러보면 여기저기서 부스럭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무에 물오르는 소리, 싹을 티우는 소리, 풀들이 땅을 열고 고개를 내미는 소리, 꽃잎이 벌어지는 소리, 이미 벌어진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들의 소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둥지를 찾아다니는 새들의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 아침 햇살에 지붕 위에서 소리 없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소리.
나이가 드니 아침이 좋고, 봄이 좋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며, 봄은 한 계절의 시작이다. 또한 시작은 곧 희망이다. 한 해의 시작이 달력으로는 1월이지만, 실질적인 시작은 봄이다. 봄에는 모두들 풍성한 가을을 꿈꾸며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는다. 시작을 보며 끝을 생각하고, 절망을 보는 사람은 없다.
2020년 봄 찾아온 코로나는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도 우리 곁을 떠날 생각을 않더니, 이제 새로운 봄을 우리와 함께 맞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작년 봄 우리는 코로나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이제는 제법 친해졌다. 곁에 두고 사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3월 초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마치고 나니 한결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1년 만에 큰 아이를 불러 함께 밥을 먹었고, 편찮으신 작은 아버지도 찾아뵈었다. 성당도 4월 초 부활절부터 실내 미사를 시작한다.
이제 곧 가족 모임도 할 수 있고, 여름쯤에는 야구장에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볕이 따스한 봄날이다. 소망 하나쯤 품어도 좋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