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다.
화자 ‘기 롤랑’은 과거의 기억을 잃은 사람이다. 그는 ‘위트’가 운영하는 흥신소에서 8년 동안 일을 했다. 흥신소가 문을 닫게 되자, 그는 고용주였던 '위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과거를 찾아 나선다. 유일한 단서는 한 장의 낡은 사진과 부고기사뿐이다. 그는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 등 자신에 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기의 유럽이 무대다. 기와 그의 친구들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 프랑스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책에는 산발적으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며 같은 사람이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기와는 어떤 관계인지 뚜렷치 않다. 그래서 이 책은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48개의 장이 넘어가며 서서히 기의 과거가 드러난다. 한 인물을 찾아가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그것을 근거로 새로운 인물을 찾아간다. 기는 자신이 ‘스테른,’ ‘지미 페드로,’ 혹은 ‘페드로 맥케부아’라 였음을 기억해낸다.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도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파악한 스토리는 이렇다. ‘페드로’라는 이름의 나에게는 ‘드니즈’라는 아내가 있었다. 전쟁 중인 프랑스에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와 나의 친구들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의 여권을 얻은 나는 금은과 보석 등을 급하게 팔아 현금으로 바꾸어 산속의 시골로 숨어든다.
그곳에서 함께 도피한 친구들과 지내던 내게 스위스 국경을 넘게 해 주겠다는 러시아 사람의 제안이 들어온다. 그는 친구들을 산장에 남겨두고 아내와 길을 나선다. 따로 국경을 넘어야 한다는 말에 차에서 내려 아내와 헤어진 나는 결국 눈 덮인 산에 버려진다. 그들에게 속은 것이다.
아마도 페드로는 그때 사경을 헤매다 구조되며 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 그 후 기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것이다. ‘페드로’는 스페인 이름이다. 따라서 그는 스페인 사람이거나 스페인 말을 쓰는 남미 국적이었을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과거는 무엇인가? 누군가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다른 이에게는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져 버렸지만 그래도 놓을 수 없는 아쉬운 과거가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도 바꿀 수도 없지만, 정작 그것 없이는 오늘의 나도 없는 것이 과거가 아닌가 싶다.
책을 읽는 동안 흑백영화의 이미지들이 계속 떠올랐다. 1930-40년대를 무대로 한 프랑스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이다. 알듯 모를 듯 끝나는 프랑스 영화처럼, 책은 그렇게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