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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호적 바꾸기

by 동쪽구름 2021. 2. 13.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한 남자’(A Man)를 영어 번역본으로 읽었다.

 

이야기는 한 남자가 벌목장에서 사고로 죽는 일로 시작된다. ‘다케모토 리에’는 남편이 연락을 끊고 사는 시집에 그의 사망 소식을 알린다. 알고 보니 그에게는 형이 있었고, 제법 재력 있는 집의 작은 아들이었다. 하지만 영정 사진을 본 형은 그가 동생인 ‘다이스케’가 아니라고 한다.

 

리에는 첫 번째 결혼의 이혼을 맡아 해결해 주었던 변호사 ‘기도 아키라’에게 남편의 신원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기도가 화자로 전개된다. 소설의 시작에는 리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변호사인 기도가 등장하면서부터 그가 주인공이 되어 버린다. 한 남자의 과거를 파헤치는 과정은 미스터리 같지만, 기도의 이야기는 순수 소설에 가깝다.

 

죽은 남자의 과거를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신분을 바꾼 여러 명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출생의 비밀 때문에 처음부터 호적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를 숨기기 위해 또는 가족과의 연을 끊기 위해 호적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돈을 받고 이들의 거래를 연결해 주는 중개인도 있다.

 

기도는 다이스케가 살아 있다면 그를 찾아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이스케의 형을 통해 그가 사라지기 전 사귀던 여자 친구를 알게 되고, 그녀의 도움을 구한다. 그 과정에서 기도는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책의 끝 무렵, 다이스케를 만나러 가는 기차에서 그녀가 거의 사랑고백에 가까운 말을 하지만 그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죽은 리에의 남편은 노름빚 때문에 일가족을 살해한 아버지의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하여 신분을 바꾸었던 것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몇 가지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결론은 없다. 기도는 한인 3세 ‘자이니치’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자이니치를 천대하고 차별하는 정서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기도의 아내는 아들이 자이니치라는 것을 숨기려 한다.

 

기도는 이혼만 하지 않았을 뿐, 한 지붕 동거에 불과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죽은 이의 신분을 알아내는 일을 끝내고 아들과 함께 놀이 공원을 찾던 날, 여느 때와 달리 다정한 아내를 보게 된다. 하지만, 아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그녀의 전화기에 뜬 메시지는 그녀가 회사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음을 암시한다.

 

리에에게는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이 있다. 그는 다이스케라는 이름을 쓰던 죽은 남자를 잘 따르며 아버지로 여기고 있었다. 죽은 아버지가 다이스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그는 혼란스러워한다. 처음에 그는 친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요네다’였다가, 엄마가 이혼을 하자 외가의 성을 따라 ‘다케모토’가 된다. 그리고 재혼을 하자 다이스케의 성을 따라 ‘다니구치’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성씨를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책은 리에가 아들에게 죽은 남자의 신원을 밝히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장을 덮어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느낌이다. 마치 채 끝나지 않은 영화를 뒤로하고 영화관을 나온 느낌이다.

 

기도의 결혼 생활은 어떻게 정리가 되었는지, 헤어진 후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다이스케와 그의 여자 친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신분을 바꾸는 일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소재다. 대개의 경우 신분을 도용하거나, 새로 만들곤 한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호적 바꾸기는 두 사람이 합의하에 바꾸는 것이다. 나는 네가 되어 살고, 너는 내가 되는 것이다. 가끔은 지금의 나를 버리고 멀리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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