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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레몬

by 동쪽구름 2021. 1. 11.

2002년 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로 들떠있던 때, 열아홉 살 소녀 ‘해언’이 공원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살해 용의자는 해언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신정준’과 ‘한만우’다. 정준은 해언이 죽던 날 타고 있던 차량의 운전자고, 만우는 그들을 목격한 인물이다.

 

추리소설이라고 해야 할 만한 내용이지만 이야기는 살해범이나 동기를 밝히는 일에 집중하지 않는다. 해언의 두 살 터울 여동생인 ‘다언’이 언니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애도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해언의 삶은 때 이른 죽음으로써 종결됐지만, 남은 이들은 그 이후에도 삶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복수’를 하거나, ‘용서’를 구하거나, ‘치유’를 찾는 것을 따라간다.

 

표지가 보여 주듯이 책 제목 ‘레몬’은 죽은 해언이 입고 있었던 노란 원피스와 같은 색이다. 작가는 책에서 반복해서 노랑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레몬, 참외, 반숙 달걀의 노른자 등 다양한 사물이 해언을 상기시켜 준다. 권 작가는 “소설 속 노랑의 이미지는 처음에는 레몬 과자처럼 밝고 명랑한 것에서 비극을 환기시키는 빛깔로 바뀌었다가, 복수를 다짐하는 빛깔로, 다시 치유의 빛으로 계속 변화한다”라고 말한다.

 

부잣집 아들인 정준은 미모의 해언을 어떻게 해 보려다 죽음에 이르게 하고, 해언이 그의 차에 타고 있는 것을 목격했던 정준의 애인 태림은 그가 범인인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미국으로 도피 유학을 다녀온 후, 정준은 태림과 결혼한다. 범인이 정준인 것을 알아낸 다언은 그들의 딸인 예빈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복수를 이룬다.

 

이 책을 읽으며 장르소설은 나름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레몬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다소 부족한 느낌의 책이다.

 

미모의 여고생 해언은 왜 속옷을 입지 않고 다닐까. 비상식적인 일이니만큼 설명이 필요하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벌리고 있다고 해서 운전자가 그 안을 볼 수 있을까?

 

다언의 어머니는 왜 작은 딸에게 성형수술을 시켜 죽은 딸의 모습으로 바꾸려 하는지. 대부분의 부모는 살아 있는 딸의 안위를 더 걱정하지 않을까?

 

만우는 아버지 다른 누이와 난쟁이 어머니를 남겨 두고 육종으로 젊은 나이에 죽는다. 그들의 가족사는 해언의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나?

 

정준과 태림의 딸 예빈을 유괴해서 키우는 것으로 다언의 복수는 이루어졌나? 남의 자식을 데려다 키우는 일이 과연 복수일까? 남의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책을 덮고 나니 이런 의문들이 생겨난다. 어쩌면 작가는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오랫동안 담고 있어, 자신은 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알며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원래 너무 잘 아는 이야기는 남들에게 하기 어렵다. 남들도 나만큼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분량으로 보면 중편소설에 가깝다. 일반 소설책보다 작은 판형이며, 201페이지라고는 하지만, 각 장의 시작에 2-3페이지씩 백지가 들어있고, 책에는 8개의 장이 있다.

 

권여선 특유의 문장력은 다소 미진한 플롯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책에 빠져 들게 한다. 정월 3일 연휴 마지막 날 저녁, 책을 집어 들고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화장실 한번 안 가고, 2시간 만에 단숨에 다 읽었다. 한숨에 책 한 권을 읽기는 참 오랜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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