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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54

어떤 인연 여동생이 중학생 때의 일이다. 아르바이트로 영어를 가르치려고 했는데 쉽게 학생을 구할 수 없었다. 그 무렵 과외공부나 가정교사는 주로 대학생들이 도맡아 했다. 내세울 학력이 없는 내가 자력으로 학생을 구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동생이 함께 과외수업을 받을 친구를 하나 소개하여 주었다. 마침 수학을 가르칠 사람은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친구가 ‘채수안’이다. (오래 전의 일이라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몇 달 동안 나는 영어를, 그는 수학을 가르쳤다. 얼마 후 동생의 친구가 그만두며 과외공부도 없어졌다. 과외를 그만둔 후에도 그는 가끔 나를 찾아왔다. 나와 바둑을 두기 위해서다. 학력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나이는 먹어 가는데 내세울 학력이 없다는 것은 내게는 큰 콤플렉스였다. 제법 영어를 익힌 후이.. 2020. 7. 18.
난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않는다 무더운 날씨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밖에 나가보면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늘었다. 금년 여름에도 변함없이 난 긴바지를 입고 지낸다. 내 옷장에는 아예 반바지가 없다. 내 나이 열두, 세 살 때쯤의 일이 아닌가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여름이 되면 짧은 바지를 입고 지냈다. 아버지의 심기가 안 좋았었는지 아니면 평소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계시던 생각이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날도 나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형제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아마도 집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꾸짖는 투로 왜 아이에게 반바지를 입혀 보기 흉한 다리를 내놓고 있느냐며 긴바지를 입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바로 긴바지로 갈아있었는.. 2020. 7. 12.
삼팔선의 봄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나 세월을 한탄하랴 삼팔선의 봄 싸워서 공을 세워 대장도 싫소 이등병 목숨 바쳐 고향 찾으리.” ‘삼팔선의 봄’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6월이 되면 ‘가요무대’에 꼭 한 번씩 등장하는 노래다. 화창한 일요일 오후, 세차장에서 차를 세차하려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났다. ‘가요무대’에서는 설운도가, 방송에서는 나훈아가 부른 것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다. 하지만 나는 어느 이름 없는 노병이 부른 버전으로 기억하고 있다. 20여 년 전, 타운의 중식당 ‘용궁’에서 어머니 환갑잔치를 해 드리던 날의 일이다. 가족들의 순서가 끝나고 가라오케 타임으로 넘어갈 즈음 헌팅캡을 삐딱하게 쓴 중년의 사내가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 2020. 6. 26.
너는 천당이 있다고 믿느냐? 수년째 전립선 암을 앓고 계신 아버지에게서 최근에는 상당히 진전된 간암이 발견되었다. 전립선암 치료를 위해 찍었던 CT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두 달 남짓한 기간에 벌써 5 파운드나 살이 빠지셨다. 어제 아침 병원에 모시고 가는 길에 생긴 일이다. 운전하는 내게 아버지가 물으셨다."너는 사람이 죽으면 천당이 있다고 믿느냐?" 생각지도 않던 질문인지라 궁색하게 "잘 모르겠네요. 보고 왔다는 사람이 없으니 알 수가 없죠."라고 답했다. 그러자 잠시 차창 밖을 바라보시던 아버지가 "없어. 없는 것 같아.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너무 허무하니까 그냥 사람들이 만든 걸 꺼야." 하시는 것이었다. 그제사 나는 내가 크게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 아버지, 있고 말고요. 혹시 아.. 2020.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