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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54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일 뿐이다 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직후의 일이다. 나이 드신 자매님 한 분이 내게 오시더니 기도를 부탁하셨다. 아직 어린 자녀가 있는 딸이 유방암인데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새로 영세받은 사람에게는 기도의 힘이 있다며 딸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부탁하셨다. 그 무렵 나는 한 두 차례 영적인 체험도 한터이라 정말 그런가 하는 마음으로 딸을 위한 기도를 몇 차례 드렸다. 정작 내 기도가 효험이 있었는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만약 상태가 나빠졌으면 그분이 더 상심할 것 같아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난봄 그분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확인할 길은 없어졌다. 외할머니는 식구가 아프거나 집안에 걱정거리가 생기면 달달한 백설기를 쪄서 냉수와 함께 소반에 올려 장독대로 갔다. 가끔은 북어가 오르기도 했다. 그 앞에서 고개를 .. 2020. 9. 12.
추리 열매 어머니의 심부름을 가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날은 덥고 길은 멀어 보였다. 정숙이네 과수원을 지나자니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추리 나무 가지가 더위에 늘어져 팔을 올리면 손에 닿을 듯싶었다. 아이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얼른 하나 따서 입어 넣었다. 아삭하고 깨무니, 단물이 입가로 흐른다. 꿀을 발라 놓은 듯 달고, 꽃보다 진한 향기가 입안에 퍼진다. 다 먹기도 전에 두어 개를 더 딴다. “너 현숙이지? 이리 와 봐.” 들켰구나.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정숙이 고모가 부른다. “어디 심부름 가니? 덥겠다. 너 이 추리 좀 먹어 볼래?” 정숙이 고모가 나무에서 추리를 하나 따서 내민다. 아이는 아무 말없이 받아 든다. “우리 집에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 좀 있는데, 가.. 2020. 9. 8.
저 별은 뉘 별인가 8월의 마지막 날이다. 하루가 지나 9월이 되면, 가을이 시작될 것이다. 해는 어느새 남쪽으로 많이 기울었고, 한낮에는 덥지만 이른 아침 문밖에 나가보면 제법 서늘하기도 하다. 아내의 텃밭에서 무성하게 자라던 호박과 토마토도 이제 끝물이다. 잎은 누렇게 퇴색되었고 소출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때가 되니 계절은 어김없이 제 자리를 찾아온다. 주말 오후 우연히 KBS World 방송을 보니 가요무대를 하고 있다. 7080 가수들이 나왔는데, 머리는 검게 물들였지만,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보면 같은 생각을 하겠지. 우리 딸보다도 어려 보이는 성악가가 나와 이병기 시인의 시 “별”을 노래한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2020. 9. 2.
딸아이의 임신 아내의 생일이라 모처럼 아이들과 식당에 모였다. 함께 사는 조카아이들도 한국에 다녀오고 세미네도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조금 늦게 도착한 세미가 자리에 앉더니 전화기를 건넨다. 받아 드니 화면에는 초음파 검사 영상이 떠있다. 첫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8주가 되었다고 한다. 교육공무원인 사위의 방학을 맞아 스페인으로 휴가 여행을 떠나기 바로 전날 알았는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8-12주가 되기 전에는 유산의 확률이 있다며 병원에서 8주 이후에나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했단다. 부모들이 알게 되면 혹시라도 여행을 가지 말라고 말릴까 싶어 말을 안 했을 것이다. 이틀 전 아침에 아내가 들려주었던 꿈이 생각났다. 아내는 꿈에서 호랑이와 커다란 잉어를 보았다며 눈.. 2020.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