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커피를 좋아한다.
내가 처음으로 원두커피의 맛을 본 것은 70년대 중반의 일이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이 된 나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독학을 하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는데 나만 자꾸 처지는 것 같아 하루는 서울에 있는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백인 카운슬러에게 나의 사정을 이야기하니 용산 미 8군의 교육센터로 연결을 해 주었다. 그 후 미국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보기 위하여 교육센터 안의 도서관으로 시험공부를 하러 다녔다.
교육센터에는 밑에 커피를 따를 수 있는 꼭지가 달린 커다란 철제 원형통에 늘 뜨거운 커피가 끓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며 가며 커피를 받아 마셨고 나도 도서관 직원이 권하여 그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인스턴트 커피와는 맛도 향도 다른 원두커피를 그때 처음 맛보았다.
그날 난 미국에서는 커피 인심이 한국의 숭늉 인심만큼이나 후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 후 80년대 미국에 이민을 와서 군대 인심과 세상인심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들어간 직장에는 커피 클럽이라는 것이 있어 가입회원들의 회비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커피를 끓이는 일도 커피 내리는 기계를 씻는 일도 순번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사라고 해서 아랫사람에게 커피 심부름 따위를 시키는 일도 없었다.
커피는 더운 날보다는 좀 싸늘한 날, 맑은 날보다는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는 날, 한낮보다는 이른 아침에 마시는 것이 더 맛있다. 난 쓴 맛이 너무 강한 진한 커피나 향신료와 설탕이 많이 들어간 커피음료는 좋아하지 않는다. 연하게 내린 블랙커피에 각설탕 반개 분량의 설탕을 넣은 커피를 좋아한다.
맛이 너무 강한 커피는 강렬한 자극, 달콤한 유혹을 연상시킨다. 난 이제 그런 것보다는 아늑하고 편안한 것이 좋은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커피도 자극이 강한 것보다는 위에 부담이 없는 순한 것이 좋다.
커피는 일회용 컵이나 본 차이나 찻잔에 담아 마시기보다는 약간 투박한 머그잔에 마시는 것이 더 맛있다. 이때는 손잡이를 사용하기보다는 머그잔을 손안 가득 잡고 마시는 것이 좋다. 손으로 전해오는 커피의 따스함이 좋기 때문이다.
담배는 남자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피워야 제맛이지만, 커피는 남자와 마시기보다는 이성과 마주 보며 마시는 것이 더 맛있다. 얼굴이 예쁜 여자보다는 다소 썰렁한 나의 우스개 소리에도 웃어줄 수 있는 여자가 좋다. 청바지에 배꼽티를 입은 여자보다는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친 여자가 좋다.
이성과 마주하며 마시는 커피에는 배경음악이 있는 것이 좋다. 냉커피를 마실 때면 경쾌한 음악이 좋고, 갓 뽑아낸 향기 좋은 커피를 마실 때는 R&B가 좋으며, 식은 커피를 마실 때는 끈적한 블루스가 좋다.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동행을 기다리며 마시는 커피에는 설렘이 있어 좋고 마감에 맞추어 일을 끝내고 마시는 커피에는 뿌듯함이 있어 좋다.
불편한 사람과 마시는 커피에는 설탕을 아무리 많이 넣어도 쓴 맛이 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마시는 커피는 유통기간이 지난 인스턴트커피 일지라도 향이 살아있다.
나와 아내는 저녁을 먹고 '스타벅스' 에 가기를 좋아한다. '스타벅스' 에서는 원두커피를 다소 진하게 끓인다. 그래서 아내는 더운물을 얻어 한 잔의 커피를 칵테일 하여 두 잔을 만든다. 그 기술이 기가 막혀 나는 아내가 물을 타서 만들어 주는 스타벅스 커피를 제일 좋아한다.
우리는 차를 주차장 한편에 세워놓고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신다.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늑함이 있으며 무드가 피어오른다. 더운 여름밤에는 열어놓은 차창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바람의 시원함이 좋고, 비가 오는 겨울날에는 차창으로 흐르는 빗물을 보며 빗소리를 듣은 즐거움이 있다. 운 좋은 날은 '스타벅스' 지붕 위로 솟아오르는 보름달을 볼 때도 있다. 그곳에 가면 집에서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술술 나온다.
난 외로운 날은 커피에 추억을 타서 마시고, 힘든 날은 희망을 타서 마신다. 술친구는 만들기 쉬워도 커피 친구 만들기는 쉽지 않다. 커피 한잔 앞에 놓고 아무 말 없이 내 곁에 함께 있어줄 친구 하나 있으면 결코 삶은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을 것이다.
이번 주말 저녁에도 나는 아내와 함께 '스타벅스' 에 갈 것이다. 아내가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치고 가면 좋겠다. 우린 차 안에 앉아 R&B를 듣다가 블루스가 나올 무렵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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