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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

잊어 주었으면 좋겠다

by 동쪽구름 2020. 6. 25.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기리는 사순시기를 맞아 고해성사를 보았다. 지은 죄를 고백하고 나오는데, 문득 지난 성탄절에도 같은 죄를 고백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고해성사 때마다 늘 반복되는 죄들이 있다. 다른 이들 쪽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그들을 판단하고 비난한 죄가 그러하며, 좀 더 너그러이 사랑하지 못한 죄가 그러하다.

형사법에서는 같은 죄를 반복하면 가중처벌을 받게 되고,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삼 진법'이라는 것이 있어, 3번 이상 형사법을 어기게 되면 엄한 벌을 받는다.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반복해서 같은 죄를 짓는 내게 가중처벌 대신 용서의 자비를 베풀어주시니 고마울 따름이다.

일상에서 남의 물건을 함부로 훔치거나 다른 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죄를 짓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러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쉽게 자주 저지르는 것 같다. 몸에 난 상처는 약을 바르면 낫고, 재산의 손실은 돈을 벌어 메꿀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오랜 세월 아물지 않는다.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영상과 글들이 난무한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책임하게 올린 글에 개인의 인권이 침해되고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받는다. 더러는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결백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일들도 발생한다.

둘이 모여 이야기를 하다 보면 흔히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한 사람이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을 내놓으면, 듣는 사람은 “그럴까”로 듣게 되고, 다른 자리에서 그 말을 옮길 때는 “그렇다” 가 되곤 한다. 이렇게 생겨난 잘못된 소문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하는 단계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때 자신의 잘못은 상대방의 언행 때문에 시작된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이는 자기 정당화가 되어 버리고 만다.

유대인의 율법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했는데 상대방이 이를 용서해 주지 않더라도 세 번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은 것이 된다고 한다.

잘못한 이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은 남을 용서해 주는 일이다. 비록 상대방이 나를 찾아와 용서를 청하지 않더라도 용서하고 잊는 것이 내게 유익하다. 남의 잘못이나 그로 인해 받았던 상처를 잊지 못하고 기억해 내는 것은 계속해서 내게 상처를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시어머니가 살아생전에 내게 심하게 굴고 섭섭하게 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계속해서 시어머니로 하여금 내게 상처를 주게 만드는 일이다. 노후에 쓰려고 모아놓았던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는 친구나 친척을 용서하지 못하면 나는 그 돈으로 인해 계속해서 화를 내고 잠을 자지 못하며 아파하게 된다. 이때 피해자는 다름 아닌 나다.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은 어딘가에서 나를 잊고 잘 살고 있을 텐데 나만 고통 중에 있는 것이다.

살아보니 세상사라는 것이 물과 같아 다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토록 가슴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별 것 아니다. 다만 내가 기억의 사진첩을 들출 때면 마치 어제 일처럼 다시 떠 오른다. 나를 기억하는 이들 중에서도 이처럼 나를 떠올리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니겠는가. 부디 나의 잘못을 용서해주었으며 한다. 용서가 안된다면 그냥 잊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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