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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기억

할머니의 고추장

by 동쪽구름 2020. 9. 30.

고추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라고 한다. 조선 개화사에 의하면 이때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을 돌살키 위하여 가져왔으나 우리 체질에 맞아 즐겨 먹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내가  매운맛을 접한 것은 3-4 살 무렵의 일이 아닌가 싶다. 김치를 물에 씻어 밥에 올려 먹은 것이 내가 처음   매운맛이다. 그 무렵의 아이들은 대개 물에 씻은 김치를 시작으로 밥상 위의 반찬에 맛을 들여 갔다. 

 

내가 자란 외가에는 손바닥 만한 마당에 반지하의 창고가 있어  지붕에 할머니의 장독들이 있었다. 그중 할머니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고추장 항아리였다. 3-4년쯤 묵힌 찹쌀고추장은 요즘 고추장과는 달리 검은빛이 돌며 끝 맛이 달짝지근했다.

 

가을이 되면 할머니는 고추를 말려 씨를 빼고 방앗간에서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었다. 봄이 되면 여기에 메주와 찹쌀가루, 소금을 넣고, 엿기름 달인 물을 부어 고추장을 담갔다. 이렇게 담가 묵힌 고추장으로 끓인 찌개가 할머니의 일품요리였다. 

 

소고기를 볶다가 무를 썰어 넣어 고추장을 풀어 끊이면 무 찌개, 두부를 넣고 끓이면 두부찌개, 가을에 말려두었던 무청을 넣고 끓이면 시래기 고추장찌개가 된다. 고추장찌개의 별미는 아무래도 매운탕이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고춧가루를 넣고 매운탕을 끓이는데, 우리 외가의 매운탕은 고추장만 넣고 끓인다. 싱싱한 민어나 조기에 고추장을 풀어 넣고 끓인 매운탕은 여름철 보양식으로 으뜸이다. 

 

할머니의 고추장으로 양념한 돼지불고기도 별미였다. 돼지 삼겹살 덩어리를 사다가 적당한 두께로 저며 고추장 양념을  두었다가 연탄불 위에 석쇠를 올려 구우면 먼저  냄새에 회가 동하고, 접시에 놓인 모습에 침이 고이며, 젓가락으로 집에 입에 넣으면  황홀한 맛에 감탄이 나오곤 했다.  놀라운 것은 정작 할머니는 돼지고기를 잡숫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양념의 맛이 짜거나 싱겁지도 않으며, 너무 맵거나 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고추장에 식초와 약간의 사이다를 넣으면 초고추장이 되는데 여기에 생선회나 돼지고기 수육을 찍어 먹으면  어울린다. 보통 돼지고기 수육을 새우젓에 찍어 먹는데 우리 집에서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이는 미국에서 자라고 태어난 우리 아이들까지 좋아해 생선전 따위도 간장보다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60년대 미국에 유학  삼촌에게는  고추장에 소고기를 갈아 넣고 볶아 만든 고추장을 깡통에 넣고 철물점에서 땜질로 봉해 소포로 보내주기도 했었다. 

 

요즘은 굴비를 구워 먹는데 외가에서는 처마 밑에 매달아 말려 결따라 찢어서 먹었다. 더운 여름날 찬물에 밥을 말아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마른 굴비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맛도 별미다. 그러나 이런 굴비는 할아버지와 내가 받는 상에나 오르고 이모와 할머니는 상추쌈에 고추장 양념을 얹거나 고추장에 풋고추를 찍어 반찬을 삼았다. 

 

아내가 끓여  두부 고추장찌개를 맛나게 먹다가 문득 할머니의 고추장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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