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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97

여자친구 8살에 미국에 온 준이가 지난가을에 대학생이 되었다. 처조카인 준이가 우리와 살게 된 사연은 매우 갑작스럽고 슬픈 일 때문이다. 11년이나 지난 일이다. 어느 날 새벽, 아내의 전화가 울렸다.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은 늘 불길하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라 서울에 사는 처남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처남은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일 년 후, 준이는 미국에 와서 우리와 살게 되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내게 초등학생 아들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꼬마 녀석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하고 잔소리해 대는 나이 많은 고모부와 살며 엄마가 보고 싶다거나 한국에 가고 싶다는 투정 없이 힘든 세월을 잘 견디어 주었다. 알파벳과 간단한 영어 인사만 겨우 익힌 아이를 학.. 2023. 12. 31.
가을 편지 내 나이 6-7살 때의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무렵 나는 소아마비를 치료하러 을지로에 있는 메이컬 센터에 다니고 있었다. 그날은 외할아버지와 병원에 갔었다. 물리치료를 마치고 약을 받아가야 했다. 할아버지는 맹장수술한 자리에 탈장이 생겨 무거운 것을 오래 들지 못하셨다. 나를 벤치에 내려놓고 모퉁이를 돌아 약국으로 약을 타러 가셨다. 곧 온다던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혹시 나를 버리고 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훌쩍이다 잠시 후,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모두들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쳐 가버렸는데, 하얀 간호사복을 입은 누나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내게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훌쩍이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나를 덥석 팔에 안고 약국으로 갔다. 마침 약을 찾아오.. 2023. 11. 25.
가여운 영혼 주일 아침, 성당 미사에 참석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노인들 뿐이다. 나만해도 50대에 성당에 다니기 시작해 이제 60 중반을 넘었다. 인구의 고령화는 교회에서도 진행 중이다. 늘 보이던 노인이 안 보이면 혹시 아픈 것이 아닌가 싶어 주변에 물어보게 된다. 몸이 아파 못 나오던 교우는 몇 주 후면 다시 나타나지만, 다투고 삐져서 떠난 교우는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 개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다들 고집을 가지고 산다. 자신의 기억과 생각만이 옳으며 남들이 틀렸다고 굳게 믿는다. 노인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라. 대개는 일방통행이다.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다가 간혹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걸 트집 잡아 언쟁이 벌어진다. 나는 4년째 매일 5년 일기장에 일기를 .. 2023. 10. 21.
그림 공부 40년 만에 대학(LAVC) 캠퍼스로 돌아갔다. 팬데믹 동안에는 온-라인 강의를 들었는데, 가을 학기부터는 거의 모든 미술 클래스가 오프-라인으로 바뀌었다. 내가 듣는 과목은 ‘수채화 I’이다. 첫날 수업에 들어가니, 작년에 온-라인 수업을 가르쳤던 교수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학생들의 연령대는 20대 초반에서 60대 중반. 대충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서, (2) 교양과목 학점이 필요해서, (3)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수업을 듣는 이들은 대개 나이가 든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처럼 정식으로 등록을 해서 과제물도 제출하고 시험도 보아 학점을 이수하려는 사람과 그냥 수업에 들어와 성적의 스트레스 없이 그림만 배우려는 사람으로 나뉜다. 늦은 .. 2023.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