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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내 옆에 있는 사람

by 동쪽구름 2020. 8. 25.

이병률 시인의 여행 산문집 ‘내 옆에 있는 사람’에는 페이지 숫자가 없고, 목차도 없다. 세어보기 전에는 몇 쪽인지, 몇 편의 산문이 실려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책의 두께를 자로 재어 보았다. 24 mm 다.

 

코로나가 시작된 후 수염을 기르고 있다. 처음에는 3 mm 길이로 다듬었는데, 너무 길다 싶어 요즘은 1 mm 클립을 끼워 다듬는다. 2 mm 가 마음에 드는 길인데, 내가 산 면도기에는 2 mm 클립은 없다. 이틀쯤 수염을 깎지 않으면 1 mm 쯤 자란다. 24 mm의 두께는 내가 48일 동안 자르지 않은 수염의 길이와 같다. 나는 이 책을 아껴가며 매일 조금씩 한 달쯤 읽었다.  

 

어떤 글은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어디서 들은 이야기 같기도 하며, 어떤 것은 그가 지어낸 이야기지 싶은 글도 있다. 제목만 보아도 흔히 볼 수 있는 산문들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두 사람을 거리에 남겨두고’

‘그녀는 그곳에 다녀간 것일까’

‘이 말들은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하루만 더 만나고 헤어져요’

‘달빛이 못다 한 마음을 비추네’

‘봄이 왔는데 당신이 가네요’

‘잊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여행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만남과 이별, 애잔한 사랑과 가슴 저리는 삶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진들이 가득이다. 산문집이라고 하지만 사진책이며 시집 같은 책이다. 마치 시를 읽듯이 아침에 읽을 때의 느낌과 저녁에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르다. 비 오는 날 읽고 위로를 받았던 글이 맑은 날 읽으니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문경을 여행하며 우연히 만났던 사과밭 주인의 사진을 찍어 준다. 몇 년 후 부음을 듣고 장례식에 가니 그가 찍어 주었던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날 밤, 사과밭 주인이 생전에 혼자 살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혼자 소주를 마시고 사과 두 개를 따서 저녁 대신 먹으며 달빛과 이야기를 나눈다. (달빛이 못다 한 마음을 비추네)

 

다리 위 포장마차에서 누군가와 술을 마시며 첫눈이 오면 그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일을 기억한다. 누구였는지 이제 생각나지 않지만 아마도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은평구 녹번동 근처에 개천이 있었고, 그 근처에 포장마차가 있었다. 밤이 되면 카바이드 등을 밝히고 우동과 어묵, 김밥, 곰장어를 구워 팔았다. 아주머니가 주인이었는데, 가끔 고등학생이었던 딸이 나와서 어머니를 도왔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소녀였다. 나는 교우들과 어울려 탁구를 치고 난 후 포장마차에 들러 우동이나 김밥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곤 했다. 그곳에서 자주 마주치던 내 나이 또래의 연인이 있었다. 혹시 첫눈이 오면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던 이병률 시인과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그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첫눈 내린다 치고, 아직도 포장마차가 있다고 치고, 우리 그 다리에서 지금 만나면 어때?” (작은 다리 위, 누구나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는 스노타이어 없이 태백에 갔다가 눈을 만나 골목에서 나오지 못하고 애를 먹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온다. (겨울나라)

 

랭캐스터에 살 때의 일이다. LA에서는 겨울에도 눈을 볼 수 없지만, 북쪽으로 50마일 떨어진 랭커스터에는 겨울이면 몇 차례 눈이 온다. 이사 가서 처음 맞는 겨울, 아무 준비 없이 하얗게 눈이 쌓인 길을 운전해서 출근하다 얼마 가지 못하고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눈길에서 차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렀다.

 

벽제 우리 집 주변으로는 온통 논밭이 있었다. 밤새 눈이 온 다음날 아침이면 마치 하얀 솜을 뿌려 놓은 듯 온 세상이 눈밭이었다. 내 방에는 양쪽 벽에 4쪽짜리 커다란 유리창이 2중으로 있었다. 바깥쪽 창은 투명하고 안쪽 창은 우윳빛이었다. 눈 오는 날 안쪽 창을 열고 있으면 마치 내리는 눈 속으로 방이 떠오르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곤 했었다.

 

24 mm 안에는 2,400 km 보다도 더 긴 길이 들어 있고, 그 보다 훨씬 더 긴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잊고 지내던 나의 기억들을 꺼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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