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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미혼모

by 동쪽구름 2021. 3. 13.

2008년 제138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가와카미 미에코'의 소설 ‘젖과 알’(Breasts and Eggs)을 영어 번역판으로 읽었다. 일본에서는 긴 문장과 난독성으로 찬반양론이 일기도 했다는데, 영어 번역본은 쉽게 쓰여 있었다.

 

책에는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두 개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는 처진 가슴을 고민하며 유방확대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 39세의 ‘마키코’와 초경을 앞둔 그녀의 딸 ‘미도리코’가 등장한다. 곧 여성이 된다는 사실에 불안함을 느끼는 미도리코는 엄마와 대화를 끊고 노트 필담으로만 의사 표현을 한다. 두 모녀가 도코에 사는 마키코의 동생인 화자 ‘나’의 아파트에서 보내는 사흘간의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앞선 글에서 화자였던 ‘나츠코’가 주인공이다. 8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녀는 이제 작가가 되었다. 나츠코는 섹스하는 것이 힘들고 싫어 남자 친구와 헤어진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자 기증을 받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혼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이 책은 다분히 여성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책이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사회적 이슈가 될만한 소재들이며 누구나 살며 접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런 점에서 흥미 있게 읽었다.

 

일본의 사회적 정서는 한국과 매우 흡사하지만, 일본이 우리보다 조금 앞에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의 일본에는 미래의 한국사회의 모습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부부에게 아이가 없으면 대부분 그 탓을 여자에게 돌린다. 책에는 남편이 무정자임이 밝혀지자, 시어머니의 강권으로 정자 기증을 받아 아이를 낳은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사이가 나빠져 손자가 중재에 나서자 시어머니는 그에게 너는 우리 집 자식이 아니라며 출생의 비밀을 말해 버린다. 남의 정자나 난자로 낳은 아이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하는지. 알린다면 어느 시점에 알려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제시한다.

 

무능력한 남편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시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는 나츠코의 친구가 있다. 남녀불평등의 사회인식을 보여준다. 그 친구가 말한다. 남편은 밖에 나가 일을 하고 생활비를 벌어오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집에 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대접받고 싶어 한다. 반면에 여자에게 가정은 일터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일터임에도 아무도 이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남자는 결혼으로 공짜로 잠자리까지 제공하는 파출부를 얻게 되는 셈이다. 

 

미국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우리 집을 보면 아들이나 사위가 보육을 절반, 또는 그 이상 돕는다. 아기를 목욕시키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등, 눈치껏 알아서 한다. 

 

미혼의 남자나 여자가 난자나 정자를 기증받아 아기를 낳는 일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일이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길냥이나 유기견은 모두 한때 누군가의 사랑을 받던 애완동물이었을 것이다. 예뻐서 한번 키워보고 싶어 시작한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 성가시고 힘들어지자 슬그머니 내다 버린 것이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입양아 학대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정자나 난자의 기증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를 찾을 권리는 있는가. 좋은 일 한다고 기증했는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내가 당신의 자식입니다”라는 방문을 받게 된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아이는 아빠와 엄마 모두를 보며 자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다. 사랑한다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후 이혼을 하면 어차피 아이는 편부모와 살게 된다. 미혼인 편부모에게 태어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 책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 보게 한다. 문장도 좋고, 이야기 구성도 탄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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