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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

5년 일기

by 동쪽구름 2020. 6. 28.

얼마 전의 일이다. 내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 초대 손님으로 나온 어떤 작가가 오래전부터 5년 일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5년 일기라니? 일기장 한 페이지를 5 등분해서 쓰는 일기란다. 작년 이맘때부터 5년 일기를 시작했다면, 오늘 일기를 쓰기 위해 노트를 열면 상단에는 작년 오늘의 기록이 나오고, 나는 그 밑에 오늘의 일기를 적게 된다.

 

그녀는 매일 일기를 쓰며 지난날을 돌아보기도 하고, 그 기록을 정리하여 책을 쓰기도 한다고 했다.

 

여태 그런 일기장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아마존에 찾아보니, 정말 그런 일기장들이 있다. 아예 한 줄 일기로 10년짜리도 있다. 5년 치 일기장으로 주문을 해서 쓰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물건을 정리하다가 수첩을 몇 개 발견했다. 수첩에는 군데군데 어머니가 적어 놓은 글이 있었다. 매일은 아니고, 무슨 날이거나 특별한 일이 있었던 날의 기록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일도 있었고, 이런 일이 있었나 싶은 것도 있다. 어떤 날은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다른 형제나 아버지가 등장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 한 번씩 꺼내보곤 한다. 

 

막상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나는 그분들의 삶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슨 계절, 어떤 꽃, 어떤 색을 좋아했는지. 가고픈 여행지는 어디였는지. 첫사랑은 누구였는지. 어머니의 어디가 좋아, 아버지의 어떤 면 때문에 결혼을 했는지.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등, 궁금한 것은 많아도 이제 알 길은 없다. 남겨진 편지나 일기장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오랫동안 일기를 써본 적이 없다. 보관하고 있는 일기장도 없다. 몇 년 전 내 블로그에 6개월 정도 썼던 일기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기다.

 

도리어 일기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 선물이 부모님에게서 받았던 일기장과 볼펜이다. 꽤 고급 장정의 일기장과 볼펜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 내 나이는 아마 8-9살 정도였을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얼마 후, 아버지가 일기장을 검사하겠다고 하셨다. 쓴 것보다는 쓰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일기는 매일 써야 한다는 주의를 들었다. 그래서 매일 썼다. “날씨가 맑다. 동생과 놀았다. 비가 왔다. 동생과 싸웠다. 만두를 먹었다. 맛있었다.” 2-3일에 한 번씩 몰아서 칸을 채워 넣었다. 두 번째 일기 검사에서 더 크게 야단을 맞았다. 그다음부터는 좀 더 성실하게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도 또다시 일기장과 볼펜을 선물로 받았다. 

 

학교에 다니던 동생들은 방학 내 놀다가 개학을 1주일 앞두고 땀을 흘리며 그림일기를 쓰곤 했다. 일기는 즐거움보다는, 일이요 부담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저녁이 되면 아침 일이 생각나지 않는 나이가 되고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1년 또는 2년 전 오늘,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던가를 보며 오늘 일기를 쓰는 것도 의미 있는 일로 여겨진다. 열심히 써 볼 생각이다. 5년을 채우고 나면 나름 좋은 기록이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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