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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

또 다른 국제시장

by 동쪽구름 2020. 7. 5.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누이동생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가니 이미 돌아가신 후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부모를 잃는 일에 준비가 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도 예외는 아니다.

 

아버지 곁에서 아내와 함께 망자를 위한 위령기도와 묵주기도를 드리며 동생들을 기다렸다. 아버지를 위해 드리는 기도인데 막상 위안을 받은 것은 나다. 늦은 밤이건만 병원의 스태프들과 장의사에서 나온 직원들이 예를 갖추어 돌아가신 분을 모신다.

 

문득 또 한편의 “국제시장” 이 막을 내린다는 생각이 든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가 마을 밖 철길을 바라보며 도시를 동경하다 어린 나이에 만주로 건너간다. 우여곡절 끝에 남방의 어느 섬에서 해방을 맞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 고향에서 그를 반기는 것은 공산당이 된 이웃과 친구들. 38선이 그어지고 남북 간 왕래가 금지된 후 밀항선을 탄 그에게 닥친 것은 기관고장이다. 표류하던 배가 겨우 항구에 닿아 꼬깃한 종이에 적힌 먼 친척 집을 찾아가지만 눈치가 보여 얼마 후 그 집을 나온다. 직업을 찾아 전전하다 발견한 것은 해양경비대원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해안경비대는 곧 해군이 되었고, 그는 소위가 되어 새로 창설하는 해병대로 자리를 옮긴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이 반격의 기회를 잡게 되는 인천 상륙작전에 화기 중대장으로 참전한 그는 서울 수복의 고비가 된 연희고지 전투를 마치고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미군의 비상식량인 C 레이션에 물린 부하들이 마침 근처 민가에 부탁해 밥을 지어놓았다고 해서 갔는데, 바로 그곳에서 전날 작전 중에 망원경에 들어왔던 빨간 스웨터의 여인을 만난 것이다.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두 사람은 60여 년을 함께 했다.

 

그 후 직업군인의 길을 걸으며 대령으로 진급, 장군의 꿈을 꾸던 그는 4.19와 5.16 등으로 군이 정치에 개입하며 상황이 바뀌는 바람에 결국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60년대 중반 예편을 한다.

 

강남이 발전하리라는 주위의 충고를 뿌리치고 그는 강북에 자리 잡는다. 고향이 가까운 탓이다. 서울의 북쪽, 통일로 변에 농장을 지어 닭을 키우고 양봉을 하다 야외식당의 원조인 갈빗집을 창업한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미국이라고 판단한 그는 잘되는 식당을 팔고 70년대 말 미국으로 이민을 온다. 계약 상의 이유로 1년 365일 하루도 문을 닫지 못하는 편의점을 10년 동안 운영하며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킨다.

 

마침내 80년대 중반 고향을 찾아 형제들과 해후한다. 부모님은 모두 세상을 떠나신 후의 일이다. 그에게는 꼭 고향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을 거듭하여 부대가 고향 근처까지 갔는데, 부대장은 외박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무단 외출을 하여 고향집을 찾아간 그는 동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곧 공산당을 물리치고 남북통일이 된다고 호언장담하고 왔는데, 그 후 그것이 문제가 되어 가족 모두 고향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는 두고두고 그때 일을 후회하며 북에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내 아버지가 살았던 “국제시장”이다.

 

이제 나는 아버지 없는 아버지 날들을 맞게 되었다. “아버지, 이제 제가 가장입니다. 어머니와 동생들 잘 돌보고 의좋게 지낼 테니 편히 쉬세요.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사셨습니다. 고맙습니다.” 

 

(5년전 썼던 글이다. 나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는 4 달 후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곁에 계시니 좋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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