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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

나도 술을 잘 마시고 싶다

by 동쪽구름 2020. 9. 24.

나도 남들처럼 술을 잘 마시고 싶다. 빈대떡이나 해물 파전을 앞에 놓고 막걸리 잔을 주고받거나, 캠프장 모닥불가에서 맥주병을 부딪치며 건배를 외치고, 페티오에 앉아 치즈나 마른 과일을 먹으며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어 올리고 싶다. 하지만 내 주량은 소주 반잔, 맥주 반 컵, 와인은 향을 맡는 정도다.

 

술 냄새만 맡아도 얼굴이 벌게지고, 술맛을 보고 나면 금방 심장이 벌름거리고 숨이 가빠진다. 남들은 기분 좋으라고 마시는 술이 내게는 힘든 산행과 같다.

 

사람들은 함께 술을 마시며 친구가 되고, 힘든 이야기를 꺼내 놓기도 한다. 적당히 술이 들어가면 평소에 하지 않는 언행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모양이다. 말이 없던 사람이 마구 말을 늘어놓거나, 얌전하던 사람이 돌출 행동을 하기도 하며, 허물을 벗어 놓고 잘 놀게 된다.

 

난 술이 안 들어가도 이런 모든 행위를 함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분위기에 따라 속 마음을 내놓을 수도 있고, 객기를 부릴 수도 있으며, 잘 놀 수도 있다. 문제는 술 안 먹은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남들이 잘 받아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아내는 나의 이런 돌출 행동에 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냐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 급수로 상대를 고르고 평가하듯이, 주량을 자랑하고 주량으로 술친구를 가른다. 술을 지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간다던가, 술자리에서 먼저 뻣은 적은 없다는 식의 허풍을 떨기도 한다.

 

나는 술을 마시기 위해 모이는 장소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적당히 기분 좋게 마시고 놀면 좋은데, 술은 술을 부르고, 결국 선을 넘기 때문이다. 그 선을 넘는 것은 딱 한 잔의 차이다. 그 한 잔의 독배를 마시는 순간 사람들은 다른 세계로 접어든다. 술을 못 마시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들에게 휩쓸려 4차원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게 된다.

 

이 4차원의 세계에는 시공의 제한이 없다. 어디라도 갈 수 있고, 무엇이든 가능하다.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고, 책임질 일도 없다. 4차원의 세계에서 벌어졌던 일은 그곳에 두고 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술을 마셨던 사람들은 모두 그 일을 그곳에 두고 오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들어갔던 나는 그 일을  다 들고 나온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 안 마시는 사람이 술자리에 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간 술 좋아하는 신부님이 있었다. 어느 날, 함께 술자리에 있다가 신부님을 사제관으로 모셔다 드리게 되었다. 그날 술자리에서는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보다 서너 살 나이가 어린 신부님이었는데,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야, 요한아, 나 정말 너를 데리고 킬리만자로에 가고 싶어. 정말이야.”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후, 그는 두 번 다시 내게 킬리만자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이미 까맣게 잊은 일을 나만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의 술자리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콜라에 럼주 몇 방울, 오렌지 주스에 보드카 몇 방울을 떨구어 들고 다니면 당연히 칵테일을 마시는 것으로 보인다.

 

수년 전 성당에 처음 나갔던 무렵의 일이다. 그날도 밥과 함께 소주가 나왔다. 마주 앉은 분이 내게 잔을 건네주며 술을 받으라고 했다. 그분은 반갑다고 권하는 술인데, 내가 “저는 술을 못합니다.” 했더니 언짢은 얼굴을 하며 계속 받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다행히 곁에서 상황을 파악한 아내가 얼른 대신 잔을 받아 마시는 것으로 어색한 상황은 무마가 됐다.

 

나도 분위기 맞춰 술을 잘 마시고 싶다. 어떤 이는 술도 조금씩 자꾸 마시다 보면 주량이 는다고 하던데, 내 경우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술 잘 마실 수 있는 약이나 주사라도 있다면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 나도 술 좀 마시고 객기를 부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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