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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종이 여자

by 동쪽구름 2021. 4. 10.

장르소설을 쓰는 작가의 작품을 여러 편 읽다 보면 그 작가만의 공식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파악한 ‘기윰 뮈소’의 이야기 전개는 대충 다음과 같다.

 

그의 소설은 엉뚱하게 시작해서 차츰 궤적을 찾아간다. 이야기에는 최소한 3-4그룹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남녀 주인공이 있고, 그들의 절친들로(대개는 남자와 여자) 이루어진 조연들이 있으며, 이야기 전개의 필요에 따라 조금은 격이 낮은 다수의 그룹이 등장한다. 같은 시각, 또는 전혀 다른 시간대에 이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야기는 시도 때도 없이 시공을 초월한다. 

 

주인공들은 대개 불우하게 자랐다. 편부모 가정, 가정 폭력,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 가난, 우범지역 등이 등장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잘 자라 성공한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에게는 형제와 같은 친구가 있다.

 

‘종이 여자’의 주인공 ‘톰 보이드’도 그런 인물이다. 유명 소설가인 그의 매니저 ‘밀로’가 바로 그런 친구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캐롤’이라는 여자 친구가 있다. 

 

사랑하는 애인 ‘오로르’를 잃은 톰은 상실감에 더 이상 후속작을 쓰지 못하고 약물중독에 폐인이 되어가고 있다. ‘천사 3부작’ 3권이 나오지 않으면 출판사에서 미리 받은 거액의 돈을 위약금과 함께 물어내야 할 판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의 매니저인 밀로가 투자 실패로 톰의 돈을 모두 날려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사 3부작’의 여주인공인 ‘빌리’가 책에서 떨어져 나와 톰 앞에 나타난다. 이 책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천사 3부작’ 2권 특별 에디션 10만 권은 내용의 절반이 인쇄가 되지 않았으며, 빌리는 그 책에서 나왔다. 잘못 인쇄된 책 99,999권은 폐기 처분되고 세상에는 오직 한 권만이 남게 된다. 그마저 없어지면 빌리도 사라질 판이다. 48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은 이 남은 한 권의 책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원래 소설이란 사실 같은 거짓이니 다소 환상적인 설정이 있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빌리라는 젊은 여성이 책에서 나왔다고 해도 별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서 내가 완전히 속으며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고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이 책에서 떨어져 나와 사람이 되었다는 설정을 그대로 믿었다니. 스토리에 너무 빠져들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기윰 뮈소가 대단한 이야기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소설은 마치 설탕을 넣고 젓지 않은 커피와 같다. 처음에는 뜨겁고 쓰지만 마실수록 조금씩 쓴 맛이 줄어들며 바닥으로 내려가면 어느새 달달하다. 그의 이야기는 서스펜스가 있는 추리소설이며, 애틋함이 있는 연애소설이다. 이 나이에 연애소설이라니.

 

책 여러 곳에서 한인들이 언급된다. 4.29 LA 폭동이 나오고, 이화여대 여학생도 등장하며, 작가가 쓴 감사의 말에는 한국 독자들에 대한 감사인사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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